이스라엘인들이 주장하는 자신의 역사를 100%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그 오랜 시간을 이집트의 노예로 지낸후 이집트 왕자였던 모세의 방황을 따라 사막을 돌아 다닌끝에 기원전 1900년경에 가나안 지역에 정착하였고 무려 700년동안 뭐했지는 모르겠지만 기원전 11세기경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건국하게 이른다.

익히 알고 있는 다윗과 솔로몬에 의해 최고 전성기를 누린 이스라엘은 기원전 9세기경 유대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으로 분열하더니 이스라엘왕국은 기원전 722년 당시 중동의 최강자였던 아시리아에 그 짧은 국가로써의 역사를 마감하고 유대왕국은 기원전 586년 신바빌로니아에 의해 지도에서 삭제당한다.

기원전 1세기경에 로마에 의해 나라가 다시 세워지나 기원후 70년경에 로마에 대한 저항으로 결국 다시 망하고 만다. 이당시 이스라엘 민중으로 부터 존경받는 인물이 예수였다는 주장과 함께 그를 따르는 12제자의 일대기가 바로 성경으로 로마에 대한 저항과 기존 사제단과의 마찰, 기적과 죽음과 부활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역사적으로 실존하였느냐는 별개로 하자)

이렇게 왕창왕창 자기나라 말아 먹은 이스라엘인들은 여기 저기 흩어져 살게 되는데 이들이 선택한 방법은 자신의 정체성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다른 나라에서 집단 거주 지역을 만들게 된다.
마치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에 한인타운, 차이나타운, 제패니스타운 등이 있는 것처럼 떠돌이 정착민 이스라엘인들도 저들 스스로 촌락을 세우고 집단으로 모여살았던 것이다.
(이점은 분명히 하고 넘어가자. 이렇게 집단으로 모여살고 직업/교육이 허락되지 않자 그들은 당시에는 천하다고 여긴 장사를 하였고 아이들의 교육은 가정에서 이루어진다. 2000년정도 지난후의 그 결과가 현재의 유태인의 모습이다.)

그렇게 융화되지 못하고 살자. 1280년 모로코에서는 "밀라"라고 하는 강제 격리구역을 만들어 난민수용소와 같이 이스라엘인들을 쳐넣고 가둬버린다. 이것이 점점 퍼져서 14~15세기경에는 전유럽으로 확대되었고 1516년경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는 운하사이의 작은 섬에 정착허가를 받고 살고 있었는데 그 지역명이 바로 게토누오보(Ghetto Nuovo), "새로지어진 주물공장"이란  뜻이다. 후에 터키에 살던 유대인들도 정착을 하였는데 게토베키오(Ghetto Vecchio), "옛날 주물공장"이란 뜻으로 이후 유대인이 사는 곳을 "게토"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로마교황청은 게토를 강변 늪지대로 설정하고 이곳에 벽을 세운후에 밤마다 잠궈 유대인의 야간 통행을 원천차단해버린다.

20세기 나치에 의해 유대인은 격리되고 이런 지역을 게토라 나치 독일 점령지 곳곳에 세워진다.
또한 그들 스스로를 감시하기위한 유대인 경찰도 존재하였다.

* 해방후의 게토 어린이들 (아우슈비츠에 비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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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토의 유대인 경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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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샤바 게토 봉기사건의 한부분을 이야기한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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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4월 19일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들은 자신들 이송결과가 가스실이라는 사실을 알자 지하기구였던 유대인투쟁기구가 앞장서서 무장봉기하게된다. 먼저 물러난 독일군은 4월 20일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실시하였고 4주간의 진압작전끝인 5월 16일 독일측 사상자 수백명에 유대인 전사자만 5만이 넘는 참혹한 결과로 끝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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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정리하여 천천히 굶겨 죽이기로 작정한 나치는 무장 저항 사건으로 인해 대놓고 죽이기 시작한것이다.
이사건이 터진 한참후인 1970년 우리가 감동했던 역사의 한장면이 연출되는데 바로 1970년 겨울 독일의 빌리 브란트 총리는 무장 저항이 있었던 바로 그장소에서 게토 추모비에 헌화하며 무릎을 꿇은 바로 그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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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 영국에 의해 독립한 이후 이스라엘은 주변국과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해 갔고 그 자세한 이야기는 일전에 이스라엘 전쟁사라는 글을 남겼었다.

1. 건국편
2. 1차전쟁편
3. 2차전쟁편
4. 3차전쟁편(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5. 4차전쟁편(번외, 60대1의사나이, 이집트, 시리아, 반격)

기나긴 전쟁이후 빼앗긴 팔레스타인인의 무장투쟁은 뭔헨 올림픽 테러등을 통해 끝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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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전쟁끝에 20세기말 PLO 아라파트와 이스라엘정부는 대립을 종식시키고 팔레스타인의 땅으로 가자지구와 웨스트뱅크를 팔레스타인 독립국으로 인정하는 평화서명을 한다.
그 평화의 길을 열었던 이스라엘 라빈 총리는 1995년 11월 이스라엘 극우에게 암살 당했지만 끝없는 노력끝에 1999년 9월 5일 와이리버 평화협정 이행합의서에 서명했다.

* 라빈총리와 조갑제 인터뷰 장면으로 인터뷰 30여 시간후 암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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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가자와 웨스트 뱅크지역을 할당받아(실은 거주허가를 받았다고 해야 하나?) 향후 독립국가로써의 로드맵대로 진행되는듯 했다. (자치정부 수립-독립국 수립)

* 이스라엘에서 이집트와 접한 구석텅이와 동예루살렘의 웨스트뱅크(이지역은 요르단으로 뺐은 지역)이 바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영토로 합의된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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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꼴을 못보는 이스라엘인들은 꼬딱지만한 가자지구를 방벽으로 쳐버리고 출입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과거 나치에서 배운 방법 그대로 팔레스타인들을 괴롭히는데 밤에 아무소리없이 군인들이 들이닥쳐 불심검문을 한다던가 말좀 안먹힌다 싶으면 방벽을 봉쇄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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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라 단 360 제곱킬로미터의 공간에 150만명이 살고 있는데 1인당 0.24 제곱미터 다시말해 24X24cm의 공간만 허락된 옛날의 나치 게토와 전혀 달를게 없는 상황이되어 버린다.

* 팔레스타인들에게는 장벽넘어의 해변도 꿈이며 사치에 불과한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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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중에 아라파트 사후 기존 PLO를 대체한 하마스는 2008년 1월 23일 장벽을 폭파시켜 이집트로의 길을 연다.

* 폭파한 장벽밖 이집트로 나온 팔레스타인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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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이 뚤린 이스라엘은 천천히 고사시키기 전략에서 아에 대놓고 죽이기로 바꿔 2009년 새해 벽두부터 전쟁을 해대는데 죽은자만 1,000여명이다.

* 거대 폭탄은 기본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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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구밀집지역에서 사용금지된 백린탄 무차별 사격에다가 야간사격도 우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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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만 지켜도 이렇게까지 많은 사상자가 생기지 않았을텐데 너무나 아쉽다.
그리고 그 역사를 지켜봐야 하는 나도 너무 괴롭다.
이스라엘인들이여. 속히 이성을 찾기 바라며 가자지구 희생자에게 깉은 애도를 보낸다.

* 스스로 악의축이 된 이스라엘에게 경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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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6 11:24 2009/01/16 11:24

드디어 이스라엘 전쟁사에서 굵직한 전쟁사를 마무리할 때가 온것 같다.
그 뒤로 이스라엘은 만만한 팔레스타인이나 한때 중동의 파리라 불리웠던 베이루트를 포함한 레바논 두들겨 패기에 여념이 없으니 그 작은 세세한 전쟁까지 쓰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 싶다.
- 10/14~15 사이의 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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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10월 13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스라엘 수비군과 이집트 공격군의 단타전이었고 이집트는 갑자기 진격을 멈추고 진지 안으로 들어가버린 상태. 이스라엘은 골란고원으로 집중된 증원으로 인해 증원도 없이 막기 바쁜 상태로 전선이 고착되었다.
14일 그동안 참호와 요새속에 쳐박혀 있던 이집트군이 전투기의 지원과 포병사격을 등에지고 이스라엘 방어군을 향해 1,000여대의 전차를 투입하였다.
이스라엘은 찔끔찔끔 증원되어온 전차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전차 600대를 모아 방어에 나섰다.
그러나 결과는 이집트의 참패!
그날 해질 무렵까지 최소 200여대의 이집트군 전차가 숯덩어리가 되었고 이제 칼자루는 이스라엘군이 쥐게 된다.
그시각 어느정도 골란고원 전투가 마무리된 시점에 이스라엘 증원부대는 헐레벌떡 시나이로 달려왔다.
- 10/15~17 사이의 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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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샤론은 이집트로의 도하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고 이 주장대로 샤론에게 모든 책임을 맡겨 버린다. 10월 15일 17:00시 증원과 정비가 완료되자 샤론 기갑여단을 주축으로하여 이집트군 방어선 북쪽으로 쇄도해 들어간다.
(샤론기갑사단은 진격로 확보, 아단기갑사단은 방어선 돌파후 이집트 3군 포위망 완성, 마간기갑사단은 아단기갑사단을 지원하였다.)
여기서 또한번의 이스라엘군 장기가 나오는데 바로 공지합동전술로 적의 SAM은 기갑부대가 적 보병부대는 기보합동부대가 적 전차는 공중화력지원으로 무력화 시켜가며 하나의 기계가 톱니바퀴 돌듯이 방어선을 돌파해버린다!

수에즈 운하를 도하완료한 시간이 16일 03:00. 단 몇시간 동안 이집트군은 침묵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역정보전에 매번 휘둘려온 이집트가 이번에는 너무 조심한 탓에 도하사실이 보고 되지 않아 버린것이다.
그결과 샤론의 부대는 후방의 비축물자, SAM기지 등 방비가 허술한 후방을 도륙내어 버리며 이집트 3군단의 포위망을 완성하여 간다.

-작전회의중인 샤론기갑사단장(이사람이 후에 총리가 된 샤론총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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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론과 모세댜얀의 만남/ 위사진과 동일 시기에 찍힌듯 하며 댜얀의 영국식 방풍경은 롬멜을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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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격부대 샤론기갑사단을 방문한 댜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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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집트로 달려나갈듯이 주행중인 이스라엘 전차와 자신의 차량위에서 식사하며 진격중인 기갑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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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나 전투가 맹렬했던지 사진과 같이 사단장이 머리에 부상을 입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언제나 그렇듯이 뛰어난 감투정신으로 주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하였고 후속부대를 수에즈 넘어 이집트로 상륙시키는데 성공한다.

- 당시 방어선 공략전에 사용된 셔먼 개조 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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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수에즈를 넘어 이집트로 진격중인 이스라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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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계획은 카이로까지의 쾌속 진격이었지만 확전을 반대하는 미국때문인지 이는 좌절되고 위 지도의 녹색선처럼 수에즈시까지 공격하여 이집트군 3군단을 포위하는것으로 만족하게 되었다.

그러나 3군단의 이목을 끌기위해 투입된 조공 기갑여단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그들의 희생덕에 후에 총리가된 샤론은 맘껏 적 후방을 유린한것이다.

- 10/18~23 사이의 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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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집트군 2군단의 주 방어선을 돌파하자 파죽지세로 3군단의 후방을 돌파해버린다.
이로써 아단/마간/샤론 기갑사단의 대포위망이 완성되어 이집트 3군은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진다.

이기간중 중동연합군은 이스라엘에게 휴전을 제의하였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한다.
그러자 중동은 석유를 무기화 (바로 OAPEC에서...)한다. 생산을 줄이겠다고 엄포를 놓는 것만으로도 전세계에 오일쇼크로 주식이 폭락하고 난리 아니었다.
그러자 부랴부랴 미국/소련이 양쪽을 달레며 휴전을 제의하고 10월 24일 UN에서 휴전이 승인된다.
휴전당시 이집트 3군단은 시나이에 병력 2만과 350여대의 전차로 버티고 있었고
이스라엘의 사론 기갑사단역시 카이로를 향해 으르르릉 대는 형국이었다.
* 전쟁후 3군단을 위한 음식과 식수가 공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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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1978년 샤론과 사다트는 시나이를 다시 이집트로 돌려주는 협정에 합의한다.
- 두사람은 아마도 힘의 경쟁이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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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이후 1994년 요르단과도 평화협정을 채결하였다.

그리고 최근들어 시리아와의 골란고원 반환문제를 여러가지 채널을 통해 협의하고 있다고 한다. 1940년대부터 1970년까지 30년이 넘는 기나긴 전쟁의 역사가 남긴것은 무엇일까?

이스라엘은 중동의 강자로써 이제는 팔레스타인과 레바논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 문제아때문에 우리 젊은이들도 남부 레바논으로 파병된다니 찹찹한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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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다가 UN군이 주둔한지 꽤 됐을 시점인 2007년 6월 26일 테러가 발생해 6명의 UN군이 죽고 2명이 중상을 입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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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몸 건강히 다녀오길 빕니다.
2007/06/27 17:09 2007/06/27 17:09

글쓰기가 가면갈수록 힘들어진다. 회사일에 녹초되고 집에서는 어여쁜 딸네미와 잠재우기 프로젝트 진행중이니 말이다.

뭐 암튼 지난번에 이집트의 전격기습에 대해 이야기했고 이번에는 그시각. 이집트가 열심히 이스라엘을 눌러버리고 있던 그시각. 시리아도 이집트와 같은 시각(1973. 10. 6 14:00)에 골란고원으로 진격을 개시하였다.

* 당당한 T-55위의 시리아 전차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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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군도 만만의 준비를 한터였다. 시리아군 코만도는 구소련헬기를 타고 나타나 골란 고원의 최고봉 헤르몬산의 관측소로 돌격하여 이스라엘군을 몰아 내며 기갑부대의 길을 활짝 열어 재꼈다.

* 1973년 10월 6일~10일까지의 작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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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동시에 3개 기갑사단이 골란고원으로 들이 닥쳤고 예전에 한번 올렸던 츠비카(http://www.wolfpack.pe.kr/77)의 이야기처럼 약 48시간동안 이스라엘 기갑부대는 고립무원의 처절한 싸움을 하였다.

이스라엘 기갑부대가 장비한 센츄리온 전차는 우수한 전차임에는 분명하지만 구소련 전차에 비해 야시장비도 없을 뿐더러 숫자도 부족했다.

양쪽에서 받는 공격에 대해 이스라엘 지도부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동과 서로 밀려오는 아랍연합군을 모두상대하기에는 벅찼고 결정적으로 10월 8일 190기갑여단이 주축이 된 반격군이 이집트 보병부대의 매복에 박살이 나버린 덕에 시나이 반도로 현재 움직일 여유가 없었던 탓도 크다. 거기다가 시나이의 거친 지형을 돌파하여 이스라엘 본토로 오는데는 어느정도 시간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전쟁지도부는 골란고원의 시리아부터 밀어내기로 결정한다. (그 순간 시나이의 이스라엘 방어군은 지원군이 오랜 시간후에 온다는 뜻과 같은 어찌보면 사형통보를 받은 기분이었으리라)

남부는 초전부터 시리아군 전차의 홍수에 박살이 나버렸다. 츠비카가 활약한 전선도 바로 여기 남부전선이다.
그에 비해 북부는 대전차 장애물로 버텨낸 7기갑여단(이스라엘 기갑부대의 원조)이 있었다. 그러나 시리아의 제파식 공격에 맛이 갈무렵. 눈물의 계곡 (위 지도에서 좌측 파란 화살표 끝과 우측의 2개의 빨간 화살표 끝이 만나는 그 지점!)에서 시리아는 일대 도박을 걸었다.
10월 8일 개전 3일째 새벽 MiG의 호위속에서 시리아의 3파 400여대의 전차가 돌격을 개시하였고 이스라엘의 7기갑여단은 100여대에서 40대로 줄어있었다. 쌍방은 제로거리에서 사격해댔고 포신과 포신이 닿고 전차의 몸체와 몸체가 만나 서로의 형체를 깔아 뭉게고 밀어붙이며 보낼때쯤 마지막 4파 T-62 400여대가 돌격하였다. 7기갑여단의 남은 전차는 겨우 6대로 누가 보더라도 이제 끝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순간 때마침 나타난 F-4팬텀기의 지상지원으로  약 30대의 시리아군 전차를 파괴시켜버린다. 한순간의 폭격에 당황한 시리아군이지만 다시 돌격을 개시한다. 그 순간, 이스라엘군 기갑부대의 증원군이 나타났고 여기에 힘빠져버린 시리아군은 약 400대의 잔해를 두고는 철수해버린다.
겨우 16대의 전차를 대규모 응원군으로 착각한 시리아의 잘못이지만... 이 한번의 실수가 결정적인 전투의 방향을 틀어버린것이다.
다음날인 9일 이스라엘은 제공권을 장악하고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와 레바논을 폭격했고 (이 전쟁으로 사실상 중동의 파리였던 레바논의 운명은 정해진듯하다...). 10월 10일 시리아 기갑부대는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말았다.

* 날아오르는 이스라엘기 당시 최신예 F-4 팬텀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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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괴되어 버린 시리아의 금쪽같은 전차들.. 눈물의 계곡에서 대전차 호를 돌파하려다 한대 한대 저격당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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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 분명한것은 이전과는 다르게 아랍군이라고해서 전차를 버리고 도망가는 병사가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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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1일부터는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밀어붙이기가 시작되었다. 거기다가 10월 13일 큰형님 미국은 C-5 겔럭시 수송기를 통해 이스라엘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 삐까뻔쩍한 M-60전차를 내려놓는 미군 수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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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한무리의 새로운 기갑부대를 발견한 이스라엘군은 이것이 이라크 지원군이라는 것을 모를리 없었고 발견과 동시에 다마스커스 전선에서 올가미를 친체 매복. 80대 이상의 T-54/55로 이루어진 이라크군을 괴멸시켜버렸다. 한술더 떠서 이라크군이 지원올 시리아 내륙 깊숙히 특공대를 파견 106mm무반동포와 C4, 그리고 공군의 지상지원과 함께 이라크 지원 기갑부대마저 도륙내버린다.
요르단군은 엉거주춤 슬쩍 발을 댔다가 슬금슬금 이스라엘군의 눈치 보는 입장이었고 거기다가 한술 더 떠서 시리아군을 오폭하던 이라크 공군기를 요격하던 시리아공군과 이라크공군이 공중전까지 펼치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14일부터는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 30km까지 밀어붙인 이스라엘은 포병을 동원하여 다마스커스에 포탄을 쏟아 부어 사실상 골란 고원전투의 끝을 맺는다.

* 푸른색선이 바로 이스라엘의 진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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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1일 이스라엘 공수부대는 시리아의 공수부대가 했던것 처럼 시리아에게 탈취당한 헤르몬산 관측소를 헬기돌격으로 탈환함으로써 그대로 복수하였다.

* 아랍군의 포화를 뒤집어쓰고 있는 이스라엘군. 소대장으로 보이는 지도를 들고 있는 군인 중심으로 빼곡히 움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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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13 15:51 2007/06/13 15:51

아~ 정말 오랜만에 다시 쓴다. 정말 자료 찾기 힘들었다. ㅡㅡa

사다트가 집권한 이집트는 소련과 북한의 군사고문단의 지원아래 강군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군개혁이 끝나는 시점부터 수에즈운하를 건너 이스라엘 방어진지를 훈련삼아 공격하는 실정이었다.

결정의 날인 1973년 10월 6일 속죄일(욤키퍼 데이)는 이스라엘이나 아랍계통이나 모두에게 종교행사일로 마치 서구권의 크리스마스, 동양에서는 구정과 같은 그런 때이기에 군도 필수병력을 제외하고 가족으로 돌아가 쉬는 그런때였다.

마치 베트남전에서 1968년 월맹에 의한 떼뜨공세(구정공세)와 같은 그런 소설과 같은 작전이 시작될 줄은 이스라엘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아직 6일전쟁의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고 시나이라는 엄청나게 넓은 땅을 자신들의 통제에 두고 있었던 때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수에즈운하의 상륙을 저지하기위해 모래언덕을 쌓았고 그 모래 언덕위에 방어초소를 지었다. 이스라엘판 마지노선 되겠다.
올라가면 갈수록 흘러내리는 모래로 인해 미끄러지는데다가 포격을 때려봤자. 천상모래이기에 포격맞은 지점의 모래가 날라가더라도 좌우에서 다른 모래들이 쏟아져 내려와 구멍난 곳을 매꾸는 비가 안오는 사막에서나 가능한 그런 최고의 요새를 만든것이다.

D-Day인 6일 이집트 코만도의 훈련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은 "또야?"정도의 반응.
- 좌측이 전쟁당일 초반부의 상황도로 붉게 큰 별표시된 부분이 개전당시의 이집트 코만도의 기습훈련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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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이집트 본대가 움직였다. 별반응 없는 휴일날의 이스라엘 수비 진지를 간단히 날려버리고 이집트 공병대가 제일먼저 설치한것은 부교도 아닌 물펌프를 이용한 물대포였다.
수에즈운하 강둑의 이스라엘 방어요새. 그 모래성을 향해 물펌프가 작동하자. 수에즈의 물로 인해 그 난공불락의 요새는 무너져 내리고 말았던 것이다.

- 열심히 노저어 수에즈를 도하하는 이집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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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대포로 열심히 쏴버리는 상황을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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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겹게 모래요새를 기어오르는 이집트군 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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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에즈 방어 요새를 휘저으며 달려 가는 이집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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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집트기 휘날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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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정말 간단한 방법으로 밀어붙여 버리자. 이스라엘 전쟁지도부는 당황한다. 전쟁준비도 안되어 있는 이스라엘은 그토록 시간을 벌어줄것이라 믿었던 모래요새가 "독일"산 워터펌프 몇대에 간단히 너무나 쉽게 나가떨어져버렸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이글을 쓰고 있는 내 자신도 너무나 쓸말이 없어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아무튼 이집트군의 작전은 20세기 가장 혁신적인 작전으로 평가받는데 10월 13일까지 수에즈 동쪽에 교도보를 구축하는데 성공한다.

이때 이스라엘의 골다메이어 수상은 전쟁지도부의 전원자결까지 언급했을정도로 이스라엘은 시껍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집트군은 전쟁기간 내내 원래 자신들의 영토였던 시나이반도의 1/4도 회복하지도 못했고 정말! 그냥! 단순히! 수에즈운하를 건너 내륙으로 기동하는 교도보를 확보하는걸로 만족해야 했다.
그럼 왜그렇게 놀라워 했는가?

첫째, 싸우면 도망가는 이집트군이 아니었다.
둘째, 싸우면 이기던 이스라엘군이 아니라 그들은 전쟁초반 약간의 살을 벤것으로도 당황해하는 패자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거기다 이집트군은 RPG-7을 비롯하여 세계최초의 대전차유도미사일 새거를 다량 배치하였고 베트남전에서 입증된 SA계열의 대공미사일을 배치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다시 그때의 상황으로 돌아가면 이집트군 코만도들은 매일 훈련하던대로 (훈련장소나 마찬가지였던 이스라엘 방어진)수에즈에 공격을 개시한지 30분만에 이스라엘 수비군을 괴멸시켜 버렸고 수에즈운하 위에는 도하하는 기갑부대들이 둥둥떠서 수에즈운하를 가로질러가고 있었다.
이에 이스라엘은 강력한 공군으로 수에즈운하를 도하하는 이집트군에 공격을 가하지만 강력한 대공방어방으로 수에즈를 건너는 기갑부대를 보호하고 공격하러온 이스라엘 공군 조종사만 죽어나갔다.
이미 베트남전에서 강력한 SAM방어망에 걸려 격추되는 미군기를 이스라엘군이라고 모를리 없었을테고.. 뭐 이까지는 그럴수 있다라고 판단했으리라.
그러나 충격적인 사건은 바로 2일뒤인 10월 8일에 일어난 기갑부대의 완패때문이었을 것이다.

10월 8일 "190기갑여단"이 주축이된 이스라엘 기갑 2개 여단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200여대의 전차로 이집트군이 구축한 교도보를 돌파하여 이집트군을 수에즈로 밀어넣을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더군다나 이집트군은 넓게 포진하고 있지 않은가?

-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향해있는 파란 화살표를 보자. 찐한 화살표가 본 단원의 주제이다.
신나게 달려나가서 이집군의 교도보를 끊어 놓으면 그 후속부대가 달려와 마무리 지을거다라는 환상속에 달려가던 이스라엘군은 한순간의 착각을 깨어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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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맞이한것은 기갑부대도 아니오 참호속에 쳐박혀서 미사일을 날려대던 이집트군 보병이었다.
- AT-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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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거리 500m~3Km 평균 시속 115km, 최고 시속 200km의 느림보 AT-3 새거 대전차 미사일을 처음 본 이스라엘 기갑부대는 경악했다. 적은 보이지도 않는데 어디선가 날아온
미사일에 아군 전차가 하나둘씩 깨져나가는데 어찌된 영문인지도 몰랐고 처음 보는 그런 무기를 보았으니 그 현장속에 있었던 전차승무원들의 공포감은 극에 달하였을 것이다. 새거를 운좋게 피했다 치더라도 당시 이집트군 3명중에 1명은 RPG-7사수였다고 한다. 다시말해 AT-3의 러쉬를 피한 전차는 참로를 돌파하였다 치더라도 RPG-7에게 옆구리나 후방을 내어주게 되었고 결국 파괴되고 말았다.

-베트남전 당시의 RPG-7
그들은 우왕좌왕하던 끝에 결국 전멸하고 말았고 재정비를 위해 후속 부대는 시나이 내륙으로 후퇴하였다.

현대적인 전차 등장이후 60년 쯔음 되는 시점에서 지금까지의 전쟁의 공식. "보병은 전차로 잡는다"가 순식간에 깨져나간 첫 사례였던 것이다.

이번편을 마치며 유용원기자의 홈피에서 활동하시는 전 북한특수부대 출신이시자 북한군 전문가로 활동하고 계신 "회오리33"님께 4차 중동전쟁 당시 북한군의 역할에 대해 여쭈어 보았는데 이에 대한 답을 마지막으로 다음편을 기약하자.

-회오리33님의 답변
4차 전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집트군대의 선공격으로 벌어져 시나이 반도를 공격햇던 그때 북한군 군사고문단이 현장에서 전투지휘를 했었다고 북한군에 있을때 확실히 강연. 자료 등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군이 수에즈운하 에 쌓아놓은 모래벽을 고압물 펌프로 허무는 작전도 북한군사고문단에서 했었다는 설~ 전후 이집트 측에서 전쟁기념관 건립과 내부전시를 북한군에 맡겼었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2007/06/13 10:17 2007/06/13 10:17
본격적인 이야기를 풀기전에 욤키푸르,라마단,10월전쟁이라고 불리워지는 전쟁의 영웅 한명의 이야기를 하나 하고 들어가도록 하자.
츠비카 그린골드라는 사나이로 현재는 군인생활을 접고 이스라엘 화학회사의 전무이사로 노년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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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비카 그린골드]

1973년 10월 6일 개전당시 젊은 중위로 아직 보직조차 받지 못하고 집에 있었다. 물론 욤키푸르(아랍에서는 라마단)이라고 하는 속죄일. 다시말해 휴일을 보내고 있던 그가 부대에 있었다면 당직근무였을것이다.
암튼 그날 오후 2시에 머리위로 전투기가 지나갔고 무전을 통해 개전사실을 알았다. 급히 제복으로 갈아 입은후에 뛰어나가 자신의 부대 숙영지로 복귀한후 M3하프트럭의 무전기를 통해 발령 받기전의 부대를 호출해서 명령계통에 들어갈것을 승락받고 전투후 수리를 위해 숙영지로 돌아온 센츄리온 전차 4대를 발견인수했다. 그러나 가동이 되는전차는 1대뿐이었고 승무원중 2명은 부상을 입은 상태이며 나머지는 쇼크에 빠져있는 상태였다. 다른 부대에서 1대를 받아 총 2대로 전장으로 달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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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전쟁때의 센츄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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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전쟁때의 센츄리온 전차와 승무원들. 하차 전투수행을 위해 우지를 소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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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욤키프 전쟁때의 센츄리온 전차]

수리가 끝나자 이 겁없는 전차장은 2대를 가지고 자신의 이름을 붙여 "Zvika's Force"(츠비카 부대)라고 이름 붙여버린후에 연대 무선망에다가 "즈비카 부대가 구원을 가겠다"고 통보해버린다.
(무슨배짱인지 2대의 전차에다가 멋대로 "부대"라는 이름 붙여버린... 황당한 배짱이다.)
더 황당한것은 고전하고 있던 기갑 부대 전체가 이 달랑 2대 전차를 구원군으로 착각해버리고 희망이 없던 기갑부대에 힘을 불어넣어 버린것이다.
"이제곧 지원군이 온다! 조금만 더 버텨라!"

그렇게 전선에 도착했을때는 이미 수백대의 시리아군 기갑사단 T-62전차가 전진해 오고 있었고 첫교전에서 자신이 타고온 전차에 이상이 생겨 다른전차로 갈아타고 타고있던 전차는 수리를 위해 기지로 돌려보낸다.
이 황당하고 배짱좋은 중위는 2가지를 느꼈다고 술회하는데 첫째, 생존확률 0%와 고독감에 대한 공포, 그리고 책임감이었다고 하며 책임감을 더 많이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결과는 어이없게도 단 1대의 전차로 수백대의 전차를 농락하고 있었다. 쏘고 뒤로 퇴각해서 은폐하고 다시 쏘고 이렇게 반복함으로써 시리아군은 대규모의 이스라엘 기갑부대에 반격당한줄 알고 진영을 재정비하기위해 멈추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였다.
이때 본인은 한 10대정도 명중시킨것으로 기억하고 있고 최초 탑재한 72발의 전차탄을 다 소모하자 파괴된 다른 아군 전차에서 포탄을 옮겨와서 보급을 마치고 또 이동과 사격을 계속 하였다고 한다.

그날밤 우지중령이 지휘하는 8~9대의 지원군이 합류했고 시리아군 T-55 수십대와 조우. 수식간에 3~4대의 이스라엘 전차가 피격되었지만 2~3대씩 짝을 지어 전진하자고 건의하였고 순간 패닉에 빠진 아군전차에 뒷통수를 맞고 운전병은 전사. 다른 승무원은 탈출. 본인은 양손과 얼굴에 화상을 입고 다른 전차로 옮겨탄다.
나머지 2~3대는 부상자를 싣고 후퇴해버려 결국 츠비카 중위 혼자 남게 되었다.

그렇게 밤을 보낸후 2일째 나바크 기지를 공략하기위해 시리아 T-62 수십대가 몰려 들어왔고 부여단장이 끌고온 6대의 전차와 13대의 동원기갑중대를 증원받아 20대로 전투에 임하게 된다.
야시장비가 없어 힘겨웠던 야간에 비해 수킬로 밖에서 명중탄을 날리는 이스라엘군이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게 되었지만 정작 나바크 기지는 북쪽으로부터의 보병, 전차 합동공격에 의해 이곳으로 이동하던 바라크 기갑여단은 여단장, 부여단장, 작전참모등의 지휘부가 전사하게 되어 지휘망이 붕괴되었다.

츠비카 중위는 방어를 위해 나바크 기지로 복귀해 단 2대의 전차로 언덕에서 나바크 기지를 공격하던 시리아군 전차를 제압하여 퇴각할 시간을 번다.
나바크 기지에서는 츠비카중위가 유일한 장교였고 츠비카 중위 차량 운전병은 전투스트레스로 철수하는 장갑차에 몸을 싣고 도망가버렸다. 후에 인사장교에게 연락해서 인사장교가 조종수를 지프에 태워 직접 나바크 기지로 왔으며 최후방어전을 치르기위해 회의하던도중 정보장교 품에 쓰러져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7일후 전장으로 복귀하였다.

30시간의 혈투끝에 그는 살아 남았고 기억나는 격파만 20여대의 적전차를 잡았다고 했지만 전투후 각종보고를 통해 60여대 이상을 격파한것으로 공식 기록되었다.
2년뒤인 1975년 이 전쟁을 통해 단 8명만이 받은 최고 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 2차 세계대전의 독일전차 에이스 미하일 비트만보다 더 격렬했고 우수했다. 왜? 혼자서 그 많은 적을 상대한것도 한것이러니와 그것보다 적보다 대등하거나 야간에는 오히려 열세의 장비를 가지고 싸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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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시장비까지 갇추고 있는 T-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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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신예 전차 T-62]
2007/03/12 11:19 2007/03/12 11:19
1970년 9월 이집트의 허풍쟁이 나세르 대통령이 갑자기 서거한다.
하지만 그의 인생을 보면 그리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던듯 하다.
그의 평전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18년생으로 왕립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2차대전때는 알랙산드리아에서 근무하였다.
1948년 1차중동전쟁때는 소령으로 대대를 이끌고 전쟁에 참가 팔루자에서 몇주동안이나 이스라엘군에 포위당해 교전중 부상을 당하고도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전투를 수행하여 이집트군중 유일하게 제대로 싸운 부대의 부대장이었다.
1차 중동전쟁후 부상치료를 위해 병원에서 지내며 왜? 전쟁에 졌는가를 고민한 끝에 정부의 부패와 무능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자유장교단"을 결성. 이집트의 완전한 독립과 개혁을 위해 쿠데타를 준비한다.
1952년 6월 23일에는 무혈쿠데타에 성공 이집트왕조를 망명시키고 토지개혁을 단행. 1956년 6월에 영국군 마저 철수시키고 대통령이 된후 2차, 3차 중동전에서 이스라엘과 싸웠다. 그러나 3차 중동전에서의 패배. 다시말해 이집트의 군사력이 회복불가능할 정도로 거덜나자 사의를 표명. 그러나 국민들의 시위로 투표후 연임하였다. 1970년 미국이 제안한 이스라엘 평화로드맵에 동의하였고 요르단에서 일어난 팔레스타인 게릴라와 요르단군의 전투를 중재하는 활동을 하는 중 아쉽게도 그해 9월 28일 심장마비로 서거하였다
지도자의 무능력하기보다는 어찌보면 이집트라는 나라의 한계에 부딪힌 인물이자 클레오파트라 이후 최초의 이집트인 지도자이자 영국에서 완전한 독립을 이루어냈고 수에즈운하를 국유화 하는등 사회주의자이면서도 이집트의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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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전대통령 나세르]

나세르가 죽자 그의 부대통령이자 전 "자유장교단"을 창설맴버였던 사다트가 집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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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군을 부활시킨 사다트 이집트 전대통령]

사다트가 집권하자 모든것을 바뀌었다. 훈장만 주렁주렁 매달고 화려한 군복입고 뒤에서 뒷짐지며 지휘하던 장교들부터 군에서 숙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부하들과 같이 뛰고 구르며 땀흘리는 젊은 장교들로 채워나갔다.
그리고 외부환경도 변했다. 소련뿐만 아니라 시리아를 지원하던 북한도 이집트를 지원했다.
비행중대1개 중대와 방공망 등으로 지원하였고 군사고문과 훈련을 담당했으며 초전 기습은 그야말로 북한의 작전대로 진행되었다. 물론 그 뒤의 기만작전 도 북한 군사고문단의 작품이다.
물론 북한이 3차 중동전쟁에서도 조종사를 포함해 1500명가량 시리아에 지원한 적이 있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그 전쟁은 이스라엘이 주도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4차 중동전쟁은 이집트에 의한 다시말해 북한에 의한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성격자체가 다르다고 할 수 있을것이다.
아무튼 이집트는 빠르게 재건되어나갔고 이집트군 코만도들은 이스라엘 방어진지를 상대로 실전 훈련하는 정도였고 이스라엘군은 중화기로 보복하는 등 휴전기간내내 서로 평화하고는 거리가 먼 싸움만 계속 하였다.

그시기 이스라엘은 3차 중동전쟁을 통해 얻은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다.
다시말해 동쪽으로 요르단과 시리아를 두들겨 패서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한데다가 서로는 수에즈 운하를 사이에 두고 운하에 계속 무너지는 모래의 특성을 이용한 높디 높은 모래요새를 만들어 기갑부대의 진입을 완전 차단한데다가 강력한 방어막마저 갖추었고 걱정되는 이집트의 공중세력과 지상세력은 완전히 소멸된 상태였으니 발뻗고 자도되는 시절이 온것이다.

요르단은 팔레스타인 게릴라들과 전투중으로 거의 실신지경이 되었다.

시리아는 뺐긴 골란고원을 어떻게든 찾아보려고 시도함과 동시에 소극적인 전쟁준비를 할뿐이었다.

이렇게 이집트의 시나이 회복작전은 준비되고 있었다.
2007/03/09 16:20 2007/03/09 16:20

이제껏 이집트와 요르단을 열심히 두들겨팬 이스라엘 이야기만 했지만 개전시점인 1967년 6월 5일 시리아군역시 공습을 두들겨 맞고 있었다. 그덕에 시리아공군은 개전날 앉아서 2/3가 날아가버렸고 도저히 강력한 이스라엘군을 상대로 작전을 펼칠 수 도 없었다.
그덕인지 시리아군은 해발 1000m의 깍아지른 골란고원의 요새에 쳐박혀 비교적 조용히 짱박혀 있었으며 이집트와 요르단 전선이 한바탕 난리 칠때도 6월 6일 이집트 방송에 속아 넘어간 시리아군 2개 대대가 T-55전차 20대를 앞세우고 공격하였다가 200여명의 손실을 낸채 후퇴한것이 공격의 전부였다.
그렇다고 이스라엘군도 무작정 요새로 뛰어들수도 없어 초초하게 증원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여기에 또하나의 변수가 있었는데 중동의 강대국에 속하는 시리아는 이스라엘 국경에 병력을 집결시킬수도 없었던 속사정이 있으니 바로 당시 집권당인 공산 바트당은 내부 정적의 위협으로 주력부대는 수도의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기위해 치안으로 돌린상태였다.(어디를 가나 내정이 가장큰 문제이다.)

이렇게 개전전의 골란고원에서 정착촌으로 쏴대던 포격도 없이 개전 5일째인 6월 9일을 맞이한다.
6월 9일 아침 북부군 사령관에게 한장의 명령서가 전달된다. 요지는 최대한 빠른시간내에 골란고원을 장악하고 시리아 본토로의 진격은 금지한다라는 명령서다.
그와 동시에 시나이반도와 Westbank 전선의 병력들이 증원된다.
6월9일 아침 9시 공수부대도 우습게아는 오랜전통의 정규보병부대인 골라니여단과 이를 지원하는 알버트기갑여단의 죽음의 등반이 시작되었다.
연약한 지반탓에 무거운 전차의 기동이 제한되었는데 공군이 요새를 폭격하는동안 보병이 네발로 기어오르고 곡갱이질 삽질을 해서 진격로를 만들면 그곳을 따라 기갑차량이 기어오르고 보병은 다시 기갑차량뒤로 잠깐 몸을 숨긴뒤에 공군의 폭격을 기다리는 식으로 그야말로 한발 한발 기어올라 갔다.
그렇게 한발 한발 죽음의 등반을 한끝에 기갑부대를 요새입구에 가져다 놓은후 전차포의 지원을 받은 골라니여단의 돌격이 시작되었다. 총 13개의 목표를 점령하는 것이었는데 돌격초기 선두에서 지휘하던 장교들이 다 죽어버렸고 어느 중대는 중사가 중대장이 되었고 어느중대는 목표참호에 도착했을때 3명만 생존하기도 했으며 단 8명만이 살아남은 중대도 있었다.
6월9일 저녁무렵 승리한 쪽은 이스라엘이었다.
그러나 이제 골란고원에 발을 디딘 이스라엘군이 모든 목표를 달성했다고 말할 수 없다. 시리아는 당황했고 6월 9일 밤 헬기를 동원한 이스라엘은 각종 물자를 실어날랐고 돌아갈때는 부상자들을 수송했으며 속속 달려온 증원부대는 다음날부터 시작될 골란고원에서의 레이스를 기대하며 재편하고 있었다.
날이 밝자 대편대의 공군 공습이 시작되었고 기갑부대를 중심으로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전일 당한 복수를 하자며 이를갈고 달렸지만 어디에도 적은 없었다.
발견한 것이라곤 텅텅빈 벙커에 문서들을 소각한 흔적, 엔진열기가 남아있는 빈 전차 들뿐이었다.
이런 황당한 사건은 당일날 아침 8시 국영방송의 "골란고원이 점령당했고 다마스커스로 이스라엘군이 진격중"이라는 속보때문이었다. 그덕에 골란고원을 지키고 있던 시리아군은 짐싸서 수도 다마스커스로 철수해버린 것이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주인이 나간 땅을 그렇다고 버려둘 이유는 없지 않는가?
아무튼 그들은 하루종일 달렸고 오후6시 UN의 정전 협정을 마무리했을때 저만치 다마스커스의 사원첨탑이 보일때쯤 진격을 멈췄다.
[골란고원에서 파괴된 시리아 전차. 프랑스 AMX-13으로 보인다.]

[한때 인간의 피와 살이 흐르던 골란고원의 벙커와 참호다.]

이로써 단 6일만에 이스라엘은 본토의 6배나 되는 땅을 점령하였다.
개전초 언제 공격당할지 그리고 공격당했던 지역을 자신들의 소유로 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위협을 제거한다.
가령 이집트는 이제 이스라엘을 공격하려면 수에즈를 건너야 하며 시리아는 골란고원의 경사를 따라 이스라엘 기갑부대가 브레이크를 풀고 기어내려오기만해도 시껍해야 할 판이다. 더군다나 요르단은 형님 나라들에 등떠밀린 덕에 GDP의 절반을 생산하던 경제요충지를 뺐겨버렸다.
[전후 수일후의 골란고원 이스라엘 어느 진지의 모습]

[골란고원을 지키던 시리아의 4호전차. 파괴되어 녹슬어 방치되고 있다.]

휴~ 길고 어려웠던 3차 중동전 6일전쟁을 마친다.
몇명 죽고 몇명 죽였다식의 숫자는 될 수 있으면 배제하려 하였다. 그런 숫자는 치열했던 전투를 증명하는 정도로만 사용했다. 몇명 죽고 죽였다가 중요한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기고 어떻게 졌으며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앞으로도 이런 취지로 글을 쓰겠다고 다짐한다.
2007/02/28 14:07 2007/02/28 14:07

시계를 돌려서 개전시점인 1967년 6월 5일로 가보자.
요르단이라는 나라의 배경을 쬐금 알필요가 있는데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은 머어어어언 친척인 팔레스타인
들을 도와줄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그러나, 요르단이라는 나라 자체가 북으로는 시리아 동으로는 이라크 남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걸프만을 건너 이집트라는 아랍강국으로 둘러싸인 아랍소국이다.
따라서, 요르단은 이스라엘이라는 아랍의 적과 싸움 뿐 아니라 형제국들 틈바구니속에서도 살아남아야 했다.

이러한 배경을 알고 있는 이스라엘은 6월 5일 개전시점에서 요르단에게 이번 전쟁에 참가하지 않아줄것을 요청하였다. 여기에는 Westbank라는 지역자체가 요르단의 GDP 절반을 생산하고 있던 경제의 중심지였으니 이것을 걸고 도박하지 않을 거라는 계산과 2차 중동전쟁에서 팔짱끼고 다른 아랍국의 요청을 묵살하고 있었던 전례, 그리고 서방의 군사지원과 그 무기로 무장하고 있던 요르단을 우습게 볼 필요가 없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보다는 형제국 (사실 이라크와 사우디, 그리고 시리아)이 무서웠던 요르단군은 이스라엘의 요청을 묵살하고 Westbank(통곡의 벽을 가운데로하여 오른쪽 지역)에서 예루살렘 시가지에 포병사격을 실시한다. 거기에는 나름대로 다른 배경이 있었다. 처음 개전당시 신나게 얻어터지던 이집트가 난데없이 이스라엘을 열심히 두들겨 패고 있다고 선전전을 실시하였고 이에 속아 넘어간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요르단이었던 것이다.
처음에 언듯보기에는 화끈한 돌격의 사전 공격으로 인식될 수 도 있겠지만 이스라엘의 주력이 시나이 반도를 관통해 갈때 주력이 빠진 적에 화력만 퍼붓는 실수를 범한다. 물론 요르단은 아직 준비가 안되어 있었다는게 내 생각이다. 왜? 당시 요르단의 주력전차부대는 이스라엘을 횡단하여 서해로 나가기위해 요르단 Westbank에 집결중이었다.이렇게 꾸물거리는 사이 시나이 전투는 고비를 넘어 승리의 여신이 이스라엘에게 미소를 보낼때쯤 급히 시나이 전선에서 빼낸 병력으로 6월 6일부터 이스라엘의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되었다.
제 55공수여단은 시나이에 투입될 예정으로 장비가 시나이 전선에 가 있는 바람에 비무장인채로 민간버스에 몸을 싣고 예루살렙으로 달려왔다. 예루살렘을 지키고 있던 에루살렘여단으로 부터 급히 실탄과 화기를 얻어고 공격 준비가 끝난시점인 6월 6일 새벽 2시에 겨우 공격을 시작할 수 있었다. 구시가지는 기원전부터 세워진 방벽과 미로와 같은 시가지, 거기다가 언덕으로 경사진 덕에 방어측이 유리한 전투였다.
[동예루살렘 구시가진의 전경]

작전 개시 2시간이 지난 시점에 1단계인 철조망과 지뢰를 돌파하는데만 여단병력의 반이 손실된다.
요르단군의 참호에 돌입하자 이제 반대의 입장이 되버렸다. 짧은 우지기관총을 소지한 이스라엘군이 길고 화력은 쎄지만 연사능력이 떨어지는 M1을 소지한 요르단군을 압도한 것이다.
요르단군은 제1왕실근위사단으로 나름 최정예였으니 그야말로 정예끼리의 전투에서 단발의 차이로 이스라엘이 승기를 꽂는다.
그시각 예루샬렘 주변 언덕을 차지하기 위해 양군의 군마인 기갑부대가 혼전을 벌였고 슈퍼셔먼을 주력으로 하고 있던 이스라엘기갑부대는 M-48 패튼으로 무장하고 있던 요르단군 기갑부대와의 전투에서 20대중 12대를 격파함으로써 또한번 승리로 만들었다.
오후6시경 예루샬렘은 이스라엘 수중에 떨어졌고 전투후 예루살렘 구시가지는 피가 흐르지 않은 골목이 없었고 탄흔이 박히지 않은 벽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55공수여단을 지원하던 기갑부대는 대부분의 전차장이 저격으로 전사한 뒤였을 정도로 치열했다고 한다.
요르단은 Eastbank까지 위협당하자 M-48 40대를 주력으로 반격을 시도한다.
이에 이스라엘의 자랑인 공군력으로 집결중인 요르단의 수송부대와 기갑부대에 대해 공습으로 대응한다.
마지막 피날레는 기갑여단이 맡았다. 제리코 도심에 진입하기위해 이동중 포도밭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던 요르단군의 M47/48전차 16대를 발견하고 이들과 다시 전투를 하였고 이들을 제압한다.(도망치기 장기인 이집트와는 또다른 면이다. 이렇기에 이스라엘은 요르단을 그나마 껄끄러워한다.)
제리코시에 진입한 이스라엘군은 요르단 수도 암만으로 부터 40km까지 밀어붙임에 따라 요르단은 UN에서 중재하는 휴전에 합의하여 전투를 종료한다.
전후 녹아없어진 이집트에 비해 손실이 그리 크지 않았다. 일례로 요르단에서는 15,000명 손실이라고 하지만 이스라엘의 전과확인은 최대 1,500에 불과하다는 발표다. 그에 비해 이스라엘은 전사 299명, 부상 1,457명의 전쟁최고의 피해를 입는다.
[작전지휘부 3인방. 우지나르키스, 모세댜얀, 후에 중동평화로드맵을 만들었다 암살된 라빈총리이다.]

[통곡의 벽에서의 이스라엘군]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고 있는 이스라엘군]
2007/02/28 12:07 2007/02/28 12:07
무지하게 바빴습니다. 덕뿐에 방문객수가 뚝!!! ㅡㅡ;; 아놔..
머 방문객수 바라고 한거는 아니지만.. ㅋㅋㅋ

드디어 이스라엘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되서 6일만에 주변국가들에게 GG받아내버린 3차 중동전쟁.
인류 전생사에 한획을 그어버렸죠.

수에즈 전쟁에서 한방 크게 먹어 버린 이집트의 낫세르는 정권이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종전 직전 참가한 영국과 프랑스를 핑계되면서...
"아~ 시바~ 그쉐(영/프)들만 참전안했어도 한방 크게 먹여서 이길수 있었는데 아놔~"
아주 세기속의 변명 ㅡㅡ;;

그덕에 1967년 이스라엘 돌아버릴 지경까지 몰렸다.
그당시 지도를 함보자. 오랜만에 고색찬란한 지도..
[##_1C|1009158260.gif|width="175" height="292" alt=""|_##]노란색이 6일전쟁 전의 이스라엘 영토, 붉은색이 6일만에 따먹은 땅이다. 최고의 부동산 투기아닌가?
(단6일간의 전쟁 한방으로 국토를 얼마나 넓힌것인지..)
아무튼 이스라엘 1967년 당시 끝장나기 직전이었다. 쪼기 "Golan Heights"로 표기된 골란고원에서는 시리아군이 이스라엘 정착촌을 대포가져다가 포격때리기로 아침시작했고 거기다 댐까지 건설하여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물길을 막아버린다.
남쪽에 이집트는 낫세르의 허풍속에 계속적인 군사적 위협을 하고 있었고 동쪽에 요르단에서는 이스라엘에서 쫒겨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PLO라는 단체를 구성해서 후세인국왕에게 이스라엘에 강경해질것을 요구하고 1964년부터는 심심하면 이스라엘로 가서 테러를 하였으니 아무튼 이스라엘 정부는 머리에 쥐가 날지경이었다.
더군다나 더 황당한것은 수에즈전쟁때 따먹었다가 UN군의 중재로 철수한 시나이반도를 5월 17일에 낫세르가 "시바~ 우리꺼니까 나가" 이 한마디에 UN군은 짐싸고 가버린다.
졸라 황당한 이스라엘!! 드디어 구원투수 다얀을 부른다.
"시바 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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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사람 나왔다! 이스라엘의 선동렬되겠다.]
이때가 1967년 6월 3일.
당시 군상황을 보면 이집트와 시리아는 군화부터 전투기까지 완벽한 소련화가 되어 있었고 요르단은 그나마 미국에서 A-4 스카이호크기를 수입할 정도로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일례로 전쟁전 20여기의 A-4를 구입한 이스라엘은 인수할 비행사를 교육시키기위해 파견하였다. 거기서 요르단 조종사들과 같이 교육받았다나?)

6월5일
아침 다들 출근하느라 바쁜시간인 7시45분 이스라엘 전투기들이 날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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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스라엘은 미라쥐IIIc/사진속의 우라강과 같은 프랑스 전투기를 사용하였다.]

이집군은 당시 26개 비행장에 300여기를 분산 배치하고 있었다.
그중 최신예기 Mig-21등의 핵심목표는 18개.
이스라엘의 공군기 댓수의 한계상 18개 목표를 전부공격하는것은 무리다. 가능한수는 총 11개까지 가능하다고 판단했고 1개 비행장당 4개편대 16대를 할당한다. 따라서, 1차 공습에 250여대의 보유기중 176대의 전투기를 투입하는 도박을 감행한것이다.
(물론 11개 목표에 대해 동시에 공격기가 도착해야 기습효과가 있는것은 다 아는 사실일테고...)
더 불가사이한 일은 시나이에 16개를 포함한 23개의 레이더 사이트를 가진 이집트 방공망에 전혀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베트남에서 이스라엘보다 월등한 장비로 미군이 입은 손해에 비하면 엄청난 전과다!)
50m의 초저공비행을 통해 레이더망을 피한후 8시쯤  이집트 국경으로 돌입한 공격대는 1개 편대의 공격시간을 15분으로 계산하고 1파가 공격하는동안 2파는 목표로 접근, 3파는 이륙, 4파는 정비를 무한반복하였다.
다시말해 내가 10대를 가졌더라도 하루 4번 출격하면 40대가 1번 출격하는것과 같고 8번을 출격하면 40대보다 2배의 전투력을 발휘한 발상의 전환이었다.(바로 선택과 집중의 마법!)

정확히 짜여진 스케줄에 의해 4파가 공격을 모두 마치면 1차 목표에 대해 1시간이나 공격을 퍼부은것이고 나머지 7개 비행장과 23개의 레이더 사이트도 같은 운명으로 개전 2시간만에 전 이집트 공군기 파괴, 개전3시간만에 23개 레이더 사이트 전멸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 시각 오전 8시 이스라엘 남부군 3개사단 6만5천의 병력은 650대의 전차에 분승하여 시나이 반도로 진격하였다. 건드린것도 이집트였고 쥐터진것도 이집트였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전혀 훈련되지 않은 병사들을 배치했고 2차 중동전에서 사용한 암호를 그대로 사용한 결과 손바닥위의 파리 잡듯이 JS-2, 최신예 T-55를 가진 이집트군을 압도한다. 개전 반나절만에 시나이 반도 반을 주파한 이스라엘군.
그날밤 10시경 또한번 이집트군의 바보짖은 계속 되었다. 무려 1개 사단의 T-55를 투입한 이집트군은 월등한 야시장비를 앞세워 밤을 지배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이스라엘군은 매복으로 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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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최신예 전차 T-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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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주력은 최신예 이집트에 비해 한세대 이상 뒤떨어진 셔먼을 베이스로 한 슈퍼셔먼]

매복에 걸린 이집트군은 7대의 전차가 파괴되었고 포를 난사하며 "와디"(사막의 말라 붙은 강바닥)을 통해서 뒤로 돌격전을 시행한다. 그러다 뒤로의 돌격역시 와디의 부드러운 흙으로 전차기동이 불가능해지고 좁은 와디를 따라 이집트군 전차가 차례차례 서버리고 말았다. (기동성이 생명인 전차가 기동력을 잃은 순간 그것은 강철의 토치카 혹은 강철의 관일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군이야 뭐 할것이 있는가? 이미 전의를 상실한 이집트군의 강철의 관(?)에다 확인사살하는 의미의 화력을 퍼부었고 다음날 50여대의 T-55가 파괴되어 고철이 되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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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에탄 T-55 T_T]

대이집트전의 24시간은 이렇게 흘러갔고 팔레스타인 게릴라에 의한 가자지구의 전투에서 60여명 전사, 200여명 부상이 가장 큰 손실로 이집트 정규군은 팔레스타인 게릴라 보다 못한 전투력으로 또다시 이름을 올린다.

개전 3일째까지 탄약과 연료만 우선공급하던 보급체계에도 과부하가 걸리기 시작했다. 선봉에 있던 샤드미여단의 바르암 전차대대의 9대는 연료부족으로 그자리에서 스톱해야할 위기가 다가온 것이다. 그들은 전차 5대에 올인하고 나머지 전차 4대를 견인하여 진격을 개시하다 이집트 반격군에 휩쓸린다.
다행히 이집트군은 이스라엘군을 적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견인하는 전차대는 전리품을 포획한 아군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한동안 같이 동행하다가 이스라엘 공군의 지원사격으로 반격군을 초토화시켜버리는 웃지못할 사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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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이 반도에서의 이스라엘 진격. 빨간원이 이집트군과 있었던 격전지이다. 시나이 남단에 상륙한 부대는 그냥 터덜터덜 걸어서 올라 갔고 사실상의 전투는 시나이 중앙에서 두들겨 팬게 전부다 되겠다.]

개전 4일째 변변한 반격조차 없이 이집트군은 여기저기에서 도망가기 바빴다. 일례로 샤론사단의 경우는 이집트 기갑여단과 조우했고 밤이되자 야시장비의 부재로 5일째 아침에 공격키로하고 매복에 들어간다.
5일째날 아침. 이집트의 전차와 대전차포는 일렬로 도열하고 있었고 사람은 없었다. (이집트군의 장기가 또 나온다. 도망...) 이후는 추격군의 일방적인 살육만 있었고 2시간동안 전차 50대, 차량 300대, 전사 1,000명의 전과를 올린다.
미트라 고개에서는 이집트군의 패주대열이 공군까지 가세한 강력한 화력에 뒤집어 쓰며 이집트군의 공동 묘지가 되어 버렸고 퇴로까지 차단당한 이집트군의 1000여대 전차들은 벙커에 쳐박혀 차례차례 박살나는 운명을 당한다. 최종적으로 이집트는 단 2개중대의 전차만 살아서 수에즈를 건널수 있었다.
6월 8일 UN의 중재로 이집트 낫세르는 휴전에 조인하고 이집트군 전력의 80%를 잃었다.(전사 12,000명, 포로 5,500명) 이스라엘은 총 61대의 전차만 잃었으나 이집트는 1천대가 넘는 전차를 잃었다. 그중 900대는 번쩍이는 신품이었고 이스라엘군은 이를 회수하여 Ti67로 개칭하여 마르고 닳도록 사용했다는 후문이다. (일부는 수출도 했다고 한다. ㅡㅡ;;)

[보너스]
- 공격중인 이스라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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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로부터 윌리스짚, 슈퍼셔먼, M3장갑차 등 2차대전의 유물을 운용하여 기적을 이룬 이스라엘군[##_1C|1164844625.jpg|width="443" height="296" alt=""|_##]이스라엘 기갑부대가 사주경제를 하며 쾌속 전진중이다.
[##_1C|1169502108.jpg|width="443" height="296" alt=""|_##]휴식또는 재보급/작전회의를 위해 정차중인 기갑부대 왼쪽 중단부분을 보면 끝없이 이어진 깃발의 행렬을 보라.
[##_1C|1370386165.jpg|width="443" height="296" alt=""|_##]당시 시리아에서 사용하던 4호전차이다. 이스라엘군 4호전차 사진을 못구해서 집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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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즈에 몸을 담근 이스라엘 병사
[##_1C|1226579211.jpg|width="360" height="480" alt=""|_##]이집트군 포로를 감시하고 있는 이스라엘군
[##_1C|1207195115.jpg|width="274" height="183" alt=""|_##]
2007/02/20 13:31 2007/02/20 13:31
흔히들 3차 중동전쟁은 시리아의 공격에 영광스러운 이스라엘의 반격으로 시작된 전쟁이라 정사에는 쓰여져 있다. 그러나 진실에 접근하기위한 단초를 오늘 쓰려한다. (3차 중동전쟁을 쓰기전에...)

1967년 6월 4일 이스라엘,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간의 전쟁에서 떠다니던 전파정보를 수집하기위해 USS 리버티호가 투입된다. 원래 이함선은 2차대전당시 수송함으로 NSA(National Security Agency)의 '기술조사선'으로 분류된 정보수집선으로 개조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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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맹 미국의 배를 이스라엘 전투기들이 견제하는 정도였다. 가끔 승무원들이 손흔들어주면 조종사도 같이 흔들어주는 그런 형편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6월 8일 이스라엘 전투기가 로켓포와 네이팜으로 이배를 두들겼고 근해에 있던 이스라엘 어뢰정이 어뢰공격을 개시하여 약 1시간의 공격을 받았다.
물론 응급 구조신호를 보냈지만 이스라엘의 전파 방해로 통신도 되지 않았으며 겨우 연락이 닿은 근처의 사라토가 항공모함에서는 전투기가 긴급발진하였지만 위로부터의 철수 명령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배는 침몰하였고 승무원 292명중 34명이 전사, 171명 부상을 입었다. 어뢰공격으로 콘솔룸이 날아가며 24명이 즉사했던것이 가장큰 타격이었다.
사건 16시간후 구축함이 도착하여 조난 승무원을 구출하였고 이사건은 이스라엘 오인공격에 의한 것으로발표났고 이스라엘은 600만 달러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종결되었다.
더웃기는 것은 미국 당국의 발표로 6분간의 이스라엘 오인사격으로 10명의 수병이 전사했다고 거짓 발표한것이다.
최근 공개된 CIA내부보고서에는 모세다얀의 명령으로 격침시켰다는것을 지적하고 있다.
도대체 리버티호는 무엇을 알고 있었을까?

아마도 이스라엘의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은 더러운 의도와 짓거리를 알고 있었을것이란 추측만 난무하고 있다.
(6일전쟁의 결과 시나이반도와 골란고원을 차지한 이스라엘. 우쭐우쭐~ ㅡㅡ;;)
2006/08/10 16:25 2006/08/10 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