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동전의 "기"자도 모르는 일본군 출신들의 무능을 까보자.
1. 채병덕
이 인간 간첩이 분명한 장군이었다.
1950년 북침떠들다가 1950년 6월 24일 전장병중 50%에게 휴가 실시. 동일 저녁 장교클럽 오픈 파티로 거의 모든 장교소집해서 술퍼먹인 인간되겠다. 거기다가 첩보대가 찍어온 전차의 사진을 묵살하였으며 개전첫날 의정부-포천 방어선에서 무너지는 7사단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수도사단 및 예비 3개 사단을 축차 투입! 5개 사단을 말아먹은 인간이다.(당시 한국군은 8개 사단이 전부)
거기다가 철수중 수많은 장비도 버려두고 한강대교 폭파!!
더군더나 분대장에게 까지 즉결권 부여. 이후 맘에 안든다고 부하 죽여 버리고 난리도 아님.
2. 유재흥
이 인간은 원균의 재림이었다. 만주군 대위 출신으로 1949년 4.3사건의 전투사령관으로 민간인 학살 지휘.
개전초 7사단장으로 부하를 잃는다. 물론 그럴수 있다. 다른 전선도 붕괴중.
이후 2군단장으로 평남 덕천, 영원 지구 전투에서 6,7,8사단 괴멸. 여기까지도 있을수 있는 일이다. 다른 전선도 붕괴중이었으니까..
이후 3군단장으로 군단 보급로인 오마치 고개가 중공군 중대병력에게 점령됨. 갑자기 군단장은 작전회의를 핑계로 비행기 편으로 후방으로 가고 (당시 회의주관자인 백선엽장군의 회고록에는 작전회의에 없었다고 회고) 이어서 후방이 차단당했다는 압박감에 모든 군단병력이 와해되었고 계급장 떼고 후방으로 도주 시작. 이후 3일간 70km나 밀린 끝에 전선 대붕괴와 함께 3군단 전멸. 이후 밴플리트는 한국군 총사령관 정일권과 3군단 사령부로 급히 가서 3군단 해체하고 작전권을 한국군으로 부터 박탈함.
더 재미있는것은 자신때문에 뺐긴 전시작전권 환수 반대를 외쳤음. 최고임!
'War History/War(1945~1999)'에 해당되는 글 15건
- 2009/09/09 글뻥 패전의 기록들 (2)
- 2008/03/22 글뻥 대만은 어떻게 몰락의 길을 걸었고 또 걸어가고 있는가? (9)
- 2007/06/27 글뻥 이스라엘 전쟁사 - 4차 중동전쟁 (이스라엘의 반격과 종료)
- 2007/06/13 글뻥 이스라엘 전쟁사 - 4차 중동전쟁 (시리아의 공격)
- 2007/06/13 글뻥 이스라엘 전쟁사 - 4차 중동전쟁 (이집트의 공격)
- 2007/03/30 글뻥 남아프리카 공화국 32대대 이야기
- 2007/03/12 글뻥 이스라엘 전쟁사 - 4차 중동전쟁 (1:60의 싸움속의 사나이) (2)
- 2007/03/09 글뻥 이스라엘 전쟁사 - 4차 중동전쟁 (들어가며)
- 2007/02/28 글뻥 이스라엘 전쟁사 - 3차 중동전쟁 - 시리아전 그리고 종전
- 2007/02/28 글뻥 이스라엘 전쟁사 - 3차 중동전쟁 - 요르단전
(솔찍히 주변국중에 한국인에게 욕 안쳐먹고 있는 나라는 러시아가 유일할듯...)
대만이 원래 그렇게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2차 대전종료후 대만은 UN상임이사국이었고 메인 승전국중 하나였던 것이다.
(물론 일본군을 상대로 열심히 쥐터지고 중국 공산당 팔로군에게는 뒤통수 맞았던 군대지만..)
그런 대만이 왜 국제사회의 미아가 되었으며 상임이사국의 자리마저 현재의 중국에게 내어주었는지에 대한 글을 퍼왔다.
(일본군하고 싸우기보다 국민당 뒷통수 치기 바빴던 중국공산당이 UN상임이사국이라니 정말 아이러니였었다.)
===이하 펌글===
한국전, 베트남전과 대만이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매우 적을 것이라고 봅니다. 대만이 유엔상임이사국에서 물러나고 심지어 외교적고립을
당한건 어찌보면 대만이 자초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대만의 몰락이 간단하게 순식간에 이루어진 일은 아닙니다.
개인도 몰락하는데 타당한 이유가 있고, 시간이 필요한 법인데 대만은 국가인데
더욱더 타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 서구국가들이 대만을 외면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설명합니다.
국공내전.. 흔히들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내전으로 알려져있지만, 이건 중국이라는 나라에서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이 벌인 냉전시대 대리전 성격이 짙습니다.
미국과 구소련으로 대표되는 분할된 냉전시대
대리전이었다는 말이죠.
국민당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고, 중국공산당은 구소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전후복구에 바쁜 구소련이었기에 미국보다는 지원이 적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구소련이 줄 수 있는 극까지 지원을 해줍니다.
모택동의 원래 목적은 중국을 성단위로 독립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해방구를 만드는 것이죠.
게릴라전을 그리고 조금씩 구소련처럼 연방제를 이루어갈려고 했습죠.
이건 국민당에 비해 열세에 있었기에 나온 전략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게 중국공산당이나 국민당이나 전쟁을 할 줄 모른다는데 있습니다.
국민당은 항일전쟁에서 승리를 한적이 거의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밀리고 방어하기 급급했죠.
하지만 미국입장에서는 패배만 하는 군대라도 일본군을 분산시킬수 있기에 있는게 좋다는
생각으로 파격적인 지원을 해줍니다.
일본이 패배한후 국공내전이 벌어졌고, 국민당은 그 부실한 면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압도적인 전력에도 불구하고 연패를 당합니다. 이에 모택동은 전격적인 전쟁을 지시하고
국민당은 대만까지 밀려나갑니다. 인민해방군이 밀려올때 국민당군은 두가지 길이
존재했습니다. 대만으로 들어가서 일단 한숨을 돌리느냐, 아니면 사천으로 들어가서
죽기살기로 싸우느냐 여기에서 국민당의 무능함이 여실하게 들어나죠.
그들은 대만을 선택합니다. 방어하기는 쉽지만 내륙으로 진출하기가 매우 힘든 섬, 대만을
선택함으로써 중국각지에 있는 국민당군은 따로따로 고립됩니다. 그리고 각개격파를 당합니다.
제대로된 지휘관이라면 설사 죽음이 목전에 도달했더라도 부하들을 위해 사지에 있어야
합니다. 부하들과 같이 있어야 지휘가 됩니다. 각개격파당할 줄 알면서 국민당은 대만으로
간겁니다. 사천에서 흩어진 군대를 모아 재기할 생각이 없었던 겁니다.
국민당이 움직이던 군대는 복건성쪽 군대가 유일했다는게 바로 국민당이 얼마나 무능했는지
보여줍니다.
더욱더 웃긴건 팔로군은 전쟁경험이 없는 군대, 오합지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군대였다는 겁니다. 일본과의 전쟁은 국민당군이 했지, 팔로군은 후방에서 세력키우기에
골몰했습니다. 전쟁경험이 없는 전략도 전술도 없는 민병대수준 군대에 연속적으로 패배만
기록한 군대일지라도 전쟁경험이 있는 정규군이 일방적으로 밀린겁니다.
이걸 옆에서 본 미국측에서는 국민당에게 실망차원을 떠나 짙은 회의감을 표시합니다.
지원이 대폭줄어듭니다. 지원이 줄어들었지만 그동안 미국에서 받은게 있기에 국민당군의
화력은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모택동은 대만으로 상륙을 지시합니다.
이때 국민당군이 유일하게 내세울 승리가 있는데 바로 금문도전투입니다.
간단하게 금문도에서 인민해방군을 몰살시킵니다.
인민해방군 1만대 국민당군 3만이었고, 압도적인 해군, 공군의 지원을 받았기에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죠. 개인 무기도 국민당군이 압도적으로 좋았습니다. 이런 당연한 승리도
위대한 전과로 광고될 정도로 국민당군이 형편없었다는 겁니다.
더 웃기는건 모택동과 야전사령관들은 인민해방군 1만명이면 손쉽게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는 겁니다. 1만 민병대대 3만 정규군의 싸움을 손쉽게 이긴다??
이런 생각을 가지게 만든 국민당군의 무능은 한숨밖에 안나오는 현실이죠.
아무튼 국민당군의 유일한 승리로인해, 모택동은 대만을 잠시 나두고 중국에 있는 잔당소탕에
나섭니다. 그러면서 대만수복을 위해 구소련으로 달려가 스탈린에게 무기좀 달라고 애원하죠.
구소련에서 무기를 받아와 훈련을 착실히(?)해 민병대수준의 군대를 준정규군수준까지
올려놓습니다. 대만침략을 명령하는 순간 바로 한국전쟁이 터집니다.
여기에서 모택동은 갈등을 합니다. 대만침략을 하느냐 아니면 한국전쟁에 참전하느냐
한국전쟁을 끝내고 바로 대만을 치자는 쪽으로 결정을 내리죠.
인민해방군은 한국전에 돌입합니다. 하지만 이번에 진짜 전쟁이라는 것을 겪어봅니다.
과거의 인민해방군이 아니다라며 자신만만하던 인민해방군은 국민당군같은 무능군이 아닌
제대로 싸우는 군대를 만나서 총력전으로 빨려들어갑니다.
한국전당시 중국의 얼마나 다급했냐면 중국시골의 파종할 씨앗조차도 징발해갈
정도였습니다. 당시 중국농촌에서는 굶어죽는 아사자가 속출합니다.
그리고 한국전에서 인민해방군 주력이 괴멸당합니다.
한국전에서 모택동의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은 아시는 분은 아실겁니다.
모택동의 아들은 인민해방군 사령관 보좌관으로 후방중에서도 가장 안전한 곳에 있었죠.
이런자가 죽을 정도면 얼마나 치열한 전쟁이었는지 아실 겁니다.
한국전쟁중 중국은 대만침략은 커녕 국가가 무너질 정도로 피폐해집니다.
그런데 웃긴게 뭐냐면 대만의 장제스가 때가 왔다며 한국, 미국에 중국침공을 주장합니다.
한국, 미국입장에서는 열받죠. 한 예를 들면 한국전쟁당시 미국은 제 9함대를 대만으로
이동시켜 중국을 공격할 의사를 대만에 전달합니다. 두개의 전장을 만들어 중국군의 전력을
분산시킬려고 한겁니다. 이때 장제스는 단호히 거절합니다.
그런 장제스가 한국군, 미군보고 중국으로 쳐들어가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리고 굉장히 생각해주는척 하면서 대만군 3만명을 지원해주겠다고 합니다.
맥아더가 있으나마나한 군대니까 올 필요없다. 대만은 빠져라. 참전거부의사를 표시합니다.
중국에 핵떨구자던 맥아더가 얼마나 열받았으면 이런 소리를 했을까요?
결국 한국전쟁은 휴전으로 종결되고,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질 정도로 피폐해진 중국은
대만점령을 포기합니다. 중국침공을 주장하던 장제스는 한국, 미국이 거절하자 바로
조용해집니다. 진짜 웃음만 나오는 상황입니다. 이렇게해서 국민당의 대만이 시작됩니다.
서구국가가 남을 이용해서 지 욕심만 채울려는 대만을 싫어하게되는 계기가 됩니다.
그리고 냉전시기에 대만이 서구진영에 포함되지않는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고.. 애매한 상황이 됩니다.
이게 바로 미국이 대만에 무기를 팔더라도 비싸게 파는 이유입니다.
중국이 무서워서 그런게 아니라 동맹으로써 취급을 못하겠다는 겁니다.
말그대로 너와 나는 친구가 아니라 서로 이익을 위해 만난 사이다 이거죠.
이익이 없으면 너랑 헤어진다.
이런 분위기가 이어지며 베트남전이 발발합니다.
여기에 또 대대수 서구국가가 말려들어갑니다. 그중에서 한국군, 미군의 활약이 눈부셨죠.
여기에서도 대만은 모든 서방진영이 참여하는 전쟁에 단호히 전투병 파병을 거절합니다.
아무튼 여기에서 국민당군같은 병쉰을 만나니.. 그게 바로 월남군입니다. 자국을 위해 싸우는데
어떻게된게 외국군대보다 전의가 없다는 겁니다. 오죽하면 외국군대 지휘관들이
월남군은 없는 군대로 치고 작전을 세웠을까요.
아무튼 철수를 결정하게되고, 미군이 빠져나갈려고 합니다. 이때 한국군이 인계철선역활을
합니다. 한국군이 최전방에서 마지막까지 싸운다는 것이죠.
좀 자세히 설명하면
한국의 대통령이던 박정희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한국 야전군이 마지막까지 남겠다. 대신 병참부대는 니들 미국이 남아라.
우리나라 민간인과 기업, 병참지원부대는 가장먼저 나가겠다.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무력이 약한 쪽을 빼내겠다는 것이니까요.
미국은 일단 사상자를 줄인다는 판단하에 오케이 합니다.
한국은 전투부대가 남고, 미군은 한국군을 지원할 병참지원부대가 남습니다.
대략적인 철수가 끝나고, 한국군과 미군만 남습니다.
이제 마지막 철수를 해야하는데 월맹.. 현베트남공산당내에서 절대 못보낸다는 기류가
읽혀집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이 똑똑한 면이 보이는게 월맹군의 공격에 취약한건
무력이 강한 한국군이 아니라, 무력이 약한 미군이라는 것이죠.
한국군은 밀려도 적당히 응전하면 철수가 가능하지만 지원기능만 있는 미군의 경우
한국군이 밀려서 패퇴할 경우 고립되어 전멸될 가능성도 농후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에 따라서 미국은 중국과 월맹에 영향력을 행사해줄 것을 부탁합니다.
중국은 월맹에 지원을 하고 있었으므로 어느정도 말빨이 먹혔죠.
후에 벌어진 중월전쟁으로 원수로 돌변했지만 이당시는 나름대로 사이가 좋았습니다.
이게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핑퐁외교입니다.
사실 월남전만 아니었다면 아직도 대만이 유엔상임이사국 자리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이때 중국은 미국에 대만을 배신할 것을 강요합니다.
미국입장에서는 일단 베트남에서 더이상 피해를 입지않고 빠지는게 중요했기에
수락합니다. 그리고 대만이 그동안 보여준 행동은 실망차원을 떠나 분노를 느끼기에
충분했습니다. 이건 자해공갈에, 이기주의를 최고수준으로 보여줬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대만은 유엔에서 퇴출되고 국제사회에서 퇴출됩니다.
그리고 오늘날 대만은 나날히 몰락해가고 있습니다.
대만이 고립된 건 대만이 자국이익만 생각할뿐 최소한의 의무도 이행하지 않았기때문입니다.
유엔상임이사국이었던 주제에 대만은 월남을 외면했었죠.
동지들이 도와달라고 말했을때 한번도 도와준적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동맹국이라는 명목으로
베트남에서 수탈만 해갔습니다. 대만인이 한 행동덕분에 베트콩이 2배 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대만은 맨날 주장하는게 한미일 끌여들여 중국을 치자는 겁니다.
웃기죠.. 암튼 우리가 알아야할 일은 최소한의 신용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저기 대만이나 중국처럼 놀면 나라가 망합니다. 대만이 고립되는 든 시간은 30년입니다.
중국도 고립되는데 드는 시간은 이정도 걸립니다. 벌써 20년 넘었으니 마지막까지 왔습니다.
중국인들이야 뻔뻔하게도 좋다고 난리지만 최소한의 위기의식도 없다는건 한심한 일입니다.
벌써 눈에 서서히 보이는데 중국인만 모르는건지 아니면 모르는척 하는건지...
그리고 관련학회 발표로 한번 망가진 이미지와 신용을 복구할려면 굉장히 긴 시간과
비용이 든다고 합니다. 대략 한번 고립되면 150년의 시간과 그동안 손해감수하는 신용회복,
천문학적인 돈이 든다고 합니다.
드디어 이스라엘 전쟁사에서 굵직한 전쟁사를 마무리할 때가 온것 같다.
그 뒤로 이스라엘은 만만한 팔레스타인이나 한때 중동의 파리라 불리웠던 베이루트를 포함한 레바논 두들겨 패기에 여념이 없으니 그 작은 세세한 전쟁까지 쓰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 싶다.
- 10/14~15 사이의 전황
14일 그동안 참호와 요새속에 쳐박혀 있던 이집트군이 전투기의 지원과 포병사격을 등에지고 이스라엘 방어군을 향해 1,000여대의 전차를 투입하였다.
이스라엘은 찔끔찔끔 증원되어온 전차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전차 600대를 모아 방어에 나섰다.
그러나 결과는 이집트의 참패!
그날 해질 무렵까지 최소 200여대의 이집트군 전차가 숯덩어리가 되었고 이제 칼자루는 이스라엘군이 쥐게 된다.
그시각 어느정도 골란고원 전투가 마무리된 시점에 이스라엘 증원부대는 헐레벌떡 시나이로 달려왔다.
- 10/15~17 사이의 전황
(샤론기갑사단은 진격로 확보, 아단기갑사단은 방어선 돌파후 이집트 3군 포위망 완성, 마간기갑사단은 아단기갑사단을 지원하였다.)
여기서 또한번의 이스라엘군 장기가 나오는데 바로 공지합동전술로 적의 SAM은 기갑부대가 적 보병부대는 기보합동부대가 적 전차는 공중화력지원으로 무력화 시켜가며 하나의 기계가 톱니바퀴 돌듯이 방어선을 돌파해버린다!
수에즈 운하를 도하완료한 시간이 16일 03:00. 단 몇시간 동안 이집트군은 침묵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역정보전에 매번 휘둘려온 이집트가 이번에는 너무 조심한 탓에 도하사실이 보고 되지 않아 버린것이다.
그결과 샤론의 부대는 후방의 비축물자, SAM기지 등 방비가 허술한 후방을 도륙내어 버리며 이집트 3군단의 포위망을 완성하여 간다.
-작전회의중인 샤론기갑사단장(이사람이 후에 총리가 된 샤론총리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언제나 그렇듯이 뛰어난 감투정신으로 주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하였고 후속부대를 수에즈 넘어 이집트로 상륙시키는데 성공한다.
- 당시 방어선 공략전에 사용된 셔먼 개조 전차

그러나 3군단의 이목을 끌기위해 투입된 조공 기갑여단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그들의 희생덕에 후에 총리가된 샤론은 맘껏 적 후방을 유린한것이다.
- 10/18~23 사이의 전황
이로써 아단/마간/샤론 기갑사단의 대포위망이 완성되어 이집트 3군은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진다.
이기간중 중동연합군은 이스라엘에게 휴전을 제의하였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한다.
그러자 중동은 석유를 무기화 (바로 OAPEC에서...)한다. 생산을 줄이겠다고 엄포를 놓는 것만으로도 전세계에 오일쇼크로 주식이 폭락하고 난리 아니었다.
그러자 부랴부랴 미국/소련이 양쪽을 달레며 휴전을 제의하고 10월 24일 UN에서 휴전이 승인된다.
휴전당시 이집트 3군단은 시나이에 병력 2만과 350여대의 전차로 버티고 있었고
이스라엘의 사론 기갑사단역시 카이로를 향해 으르르릉 대는 형국이었다.
* 전쟁후 3군단을 위한 음식과 식수가 공급되고 있다.

전후 1978년 샤론과 사다트는 시나이를 다시 이집트로 돌려주는 협정에 합의한다.
- 두사람은 아마도 힘의 경쟁이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최근들어 시리아와의 골란고원 반환문제를 여러가지 채널을 통해 협의하고 있다고 한다. 1940년대부터 1970년까지 30년이 넘는 기나긴 전쟁의 역사가 남긴것은 무엇일까?
이스라엘은 중동의 강자로써 이제는 팔레스타인과 레바논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 문제아때문에 우리 젊은이들도 남부 레바논으로 파병된다니 찹찹한 심정이다.

부디 몸 건강히 다녀오길 빕니다.
글쓰기가 가면갈수록 힘들어진다. 회사일에 녹초되고 집에서는 어여쁜 딸네미와 잠재우기 프로젝트 진행중이니 말이다.
뭐 암튼 지난번에 이집트의 전격기습에 대해 이야기했고 이번에는 그시각. 이집트가 열심히 이스라엘을 눌러버리고 있던 그시각. 시리아도 이집트와 같은 시각(1973. 10. 6 14:00)에 골란고원으로 진격을 개시하였다.
* 당당한 T-55위의 시리아 전차병들

시리아군도 만만의 준비를 한터였다. 시리아군 코만도는 구소련헬기를 타고 나타나 골란 고원의 최고봉 헤르몬산의 관측소로 돌격하여 이스라엘군을 몰아 내며 기갑부대의 길을 활짝 열어 재꼈다.
* 1973년 10월 6일~10일까지의 작전도

이스라엘 기갑부대가 장비한 센츄리온 전차는 우수한 전차임에는 분명하지만 구소련 전차에 비해 야시장비도 없을 뿐더러 숫자도 부족했다.
양쪽에서 받는 공격에 대해 이스라엘 지도부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동과 서로 밀려오는 아랍연합군을 모두상대하기에는 벅찼고 결정적으로 10월 8일 190기갑여단이 주축이 된 반격군이 이집트 보병부대의 매복에 박살이 나버린 덕에 시나이 반도로 현재 움직일 여유가 없었던 탓도 크다. 거기다가 시나이의 거친 지형을 돌파하여 이스라엘 본토로 오는데는 어느정도 시간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전쟁지도부는 골란고원의 시리아부터 밀어내기로 결정한다. (그 순간 시나이의 이스라엘 방어군은 지원군이 오랜 시간후에 온다는 뜻과 같은 어찌보면 사형통보를 받은 기분이었으리라)
남부는 초전부터 시리아군 전차의 홍수에 박살이 나버렸다. 츠비카가 활약한 전선도 바로 여기 남부전선이다.
그에 비해 북부는 대전차 장애물로 버텨낸 7기갑여단(이스라엘 기갑부대의 원조)이 있었다. 그러나 시리아의 제파식 공격에 맛이 갈무렵. 눈물의 계곡 (위 지도에서 좌측 파란 화살표 끝과 우측의 2개의 빨간 화살표 끝이 만나는 그 지점!)에서 시리아는 일대 도박을 걸었다.
10월 8일 개전 3일째 새벽 MiG의 호위속에서 시리아의 3파 400여대의 전차가 돌격을 개시하였고 이스라엘의 7기갑여단은 100여대에서 40대로 줄어있었다. 쌍방은 제로거리에서 사격해댔고 포신과 포신이 닿고 전차의 몸체와 몸체가 만나 서로의 형체를 깔아 뭉게고 밀어붙이며 보낼때쯤 마지막 4파 T-62 400여대가 돌격하였다. 7기갑여단의 남은 전차는 겨우 6대로 누가 보더라도 이제 끝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순간 때마침 나타난 F-4팬텀기의 지상지원으로 약 30대의 시리아군 전차를 파괴시켜버린다. 한순간의 폭격에 당황한 시리아군이지만 다시 돌격을 개시한다. 그 순간, 이스라엘군 기갑부대의 증원군이 나타났고 여기에 힘빠져버린 시리아군은 약 400대의 잔해를 두고는 철수해버린다.
겨우 16대의 전차를 대규모 응원군으로 착각한 시리아의 잘못이지만... 이 한번의 실수가 결정적인 전투의 방향을 틀어버린것이다.
다음날인 9일 이스라엘은 제공권을 장악하고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와 레바논을 폭격했고 (이 전쟁으로 사실상 중동의 파리였던 레바논의 운명은 정해진듯하다...). 10월 10일 시리아 기갑부대는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말았다.
* 날아오르는 이스라엘기 당시 최신예 F-4 팬텀기이다.

* 파괴되어 버린 시리아의 금쪽같은 전차들.. 눈물의 계곡에서 대전차 호를 돌파하려다 한대 한대 저격당한 것으로 보인다.


10월 11일부터는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밀어붙이기가 시작되었다. 거기다가 10월 13일 큰형님 미국은 C-5 겔럭시 수송기를 통해 이스라엘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 삐까뻔쩍한 M-60전차를 내려놓는 미군 수송기

13일 한무리의 새로운 기갑부대를 발견한 이스라엘군은 이것이 이라크 지원군이라는 것을 모를리 없었고 발견과 동시에 다마스커스 전선에서 올가미를 친체 매복. 80대 이상의 T-54/55로 이루어진 이라크군을 괴멸시켜버렸다. 한술더 떠서 이라크군이 지원올 시리아 내륙 깊숙히 특공대를 파견 106mm무반동포와 C4, 그리고 공군의 지상지원과 함께 이라크 지원 기갑부대마저 도륙내버린다.
요르단군은 엉거주춤 슬쩍 발을 댔다가 슬금슬금 이스라엘군의 눈치 보는 입장이었고 거기다가 한술 더 떠서 시리아군을 오폭하던 이라크 공군기를 요격하던 시리아공군과 이라크공군이 공중전까지 펼치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14일부터는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 30km까지 밀어붙인 이스라엘은 포병을 동원하여 다마스커스에 포탄을 쏟아 부어 사실상 골란 고원전투의 끝을 맺는다.
* 푸른색선이 바로 이스라엘의 진출선이다.

* 아랍군의 포화를 뒤집어쓰고 있는 이스라엘군. 소대장으로 보이는 지도를 들고 있는 군인 중심으로 빼곡히 움크려 있다.

아~ 정말 오랜만에 다시 쓴다. 정말 자료 찾기 힘들었다. ㅡㅡa
사다트가 집권한 이집트는 소련과 북한의 군사고문단의 지원아래 강군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군개혁이 끝나는 시점부터 수에즈운하를 건너 이스라엘 방어진지를 훈련삼아 공격하는 실정이었다.
결정의 날인 1973년 10월 6일 속죄일(욤키퍼 데이)는 이스라엘이나 아랍계통이나 모두에게 종교행사일로 마치 서구권의 크리스마스, 동양에서는 구정과 같은 그런 때이기에 군도 필수병력을 제외하고 가족으로 돌아가 쉬는 그런때였다.
마치 베트남전에서 1968년 월맹에 의한 떼뜨공세(구정공세)와 같은 그런 소설과 같은 작전이 시작될 줄은 이스라엘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아직 6일전쟁의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고 시나이라는 엄청나게 넓은 땅을 자신들의 통제에 두고 있었던 때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수에즈운하의 상륙을 저지하기위해 모래언덕을 쌓았고 그 모래 언덕위에 방어초소를 지었다. 이스라엘판 마지노선 되겠다.
올라가면 갈수록 흘러내리는 모래로 인해 미끄러지는데다가 포격을 때려봤자. 천상모래이기에 포격맞은 지점의 모래가 날라가더라도 좌우에서 다른 모래들이 쏟아져 내려와 구멍난 곳을 매꾸는 비가 안오는 사막에서나 가능한 그런 최고의 요새를 만든것이다.
D-Day인 6일 이집트 코만도의 훈련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은 "또야?"정도의 반응.
- 좌측이 전쟁당일 초반부의 상황도로 붉게 큰 별표시된 부분이 개전당시의 이집트 코만도의 기습훈련장이다.
드디어 이집트 본대가 움직였다. 별반응 없는 휴일날의 이스라엘 수비 진지를 간단히 날려버리고 이집트 공병대가 제일먼저 설치한것은 부교도 아닌 물펌프를 이용한 물대포였다.
수에즈운하 강둑의 이스라엘 방어요새. 그 모래성을 향해 물펌프가 작동하자. 수에즈의 물로 인해 그 난공불락의 요새는 무너져 내리고 말았던 것이다.
- 열심히 노저어 수에즈를 도하하는 이집트군.

- 물대포로 열심히 쏴버리는 상황을 그린 그림.
- 힘겹게 모래요새를 기어오르는 이집트군 보병


- 이집트기 휘날리며~

이렇게 정말 간단한 방법으로 밀어붙여 버리자. 이스라엘 전쟁지도부는 당황한다. 전쟁준비도 안되어 있는 이스라엘은 그토록 시간을 벌어줄것이라 믿었던 모래요새가 "독일"산 워터펌프 몇대에 간단히 너무나 쉽게 나가떨어져버렸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이글을 쓰고 있는 내 자신도 너무나 쓸말이 없어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아무튼 이집트군의 작전은 20세기 가장 혁신적인 작전으로 평가받는데 10월 13일까지 수에즈 동쪽에 교도보를 구축하는데 성공한다.
이때 이스라엘의 골다메이어 수상은 전쟁지도부의 전원자결까지 언급했을정도로 이스라엘은 시껍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집트군은 전쟁기간 내내 원래 자신들의 영토였던 시나이반도의 1/4도 회복하지도 못했고 정말! 그냥! 단순히! 수에즈운하를 건너 내륙으로 기동하는 교도보를 확보하는걸로 만족해야 했다.
그럼 왜그렇게 놀라워 했는가?
첫째, 싸우면 도망가는 이집트군이 아니었다.
둘째, 싸우면 이기던 이스라엘군이 아니라 그들은 전쟁초반 약간의 살을 벤것으로도 당황해하는 패자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거기다 이집트군은 RPG-7을 비롯하여 세계최초의 대전차유도미사일 새거를 다량 배치하였고 베트남전에서 입증된 SA계열의 대공미사일을 배치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다시 그때의 상황으로 돌아가면 이집트군 코만도들은 매일 훈련하던대로 (훈련장소나 마찬가지였던 이스라엘 방어진)수에즈에 공격을 개시한지 30분만에 이스라엘 수비군을 괴멸시켜 버렸고 수에즈운하 위에는 도하하는 기갑부대들이 둥둥떠서 수에즈운하를 가로질러가고 있었다.
이에 이스라엘은 강력한 공군으로 수에즈운하를 도하하는 이집트군에 공격을 가하지만 강력한 대공방어방으로 수에즈를 건너는 기갑부대를 보호하고 공격하러온 이스라엘 공군 조종사만 죽어나갔다.
이미 베트남전에서 강력한 SAM방어망에 걸려 격추되는 미군기를 이스라엘군이라고 모를리 없었을테고.. 뭐 이까지는 그럴수 있다라고 판단했으리라.
그러나 충격적인 사건은 바로 2일뒤인 10월 8일에 일어난 기갑부대의 완패때문이었을 것이다.
10월 8일 "190기갑여단"이 주축이된 이스라엘 기갑 2개 여단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200여대의 전차로 이집트군이 구축한 교도보를 돌파하여 이집트군을 수에즈로 밀어넣을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더군다나 이집트군은 넓게 포진하고 있지 않은가?
-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향해있는 파란 화살표를 보자. 찐한 화살표가 본 단원의 주제이다.
신나게 달려나가서 이집군의 교도보를 끊어 놓으면 그 후속부대가 달려와 마무리 지을거다라는 환상속에 달려가던 이스라엘군은 한순간의 착각을 깨어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을 맞이한것은 기갑부대도 아니오 참호속에 쳐박혀서 미사일을 날려대던 이집트군 보병이었다.
- AT-3

사거리 500m~3Km 평균 시속 115km, 최고 시속 200km의 느림보 AT-3 새거 대전차 미사일을 처음 본 이스라엘 기갑부대는 경악했다. 적은 보이지도 않는데 어디선가 날아온
미사일에 아군 전차가 하나둘씩 깨져나가는데 어찌된 영문인지도 몰랐고 처음 보는 그런 무기를 보았으니 그 현장속에 있었던 전차승무원들의 공포감은 극에 달하였을 것이다. 새거를 운좋게 피했다 치더라도 당시 이집트군 3명중에 1명은 RPG-7사수였다고 한다. 다시말해 AT-3의 러쉬를 피한 전차는 참로를 돌파하였다 치더라도 RPG-7에게 옆구리나 후방을 내어주게 되었고 결국 파괴되고 말았다.
-베트남전 당시의 RPG-7
그들은 우왕좌왕하던 끝에 결국 전멸하고 말았고 재정비를 위해 후속 부대는 시나이 내륙으로 후퇴하였다.
현대적인 전차 등장이후 60년 쯔음 되는 시점에서 지금까지의 전쟁의 공식. "보병은 전차로 잡는다"가 순식간에 깨져나간 첫 사례였던 것이다.
이번편을 마치며 유용원기자의 홈피에서 활동하시는 전 북한특수부대 출신이시자 북한군 전문가로 활동하고 계신 "회오리33"님께 4차 중동전쟁 당시 북한군의 역할에 대해 여쭈어 보았는데 이에 대한 답을 마지막으로 다음편을 기약하자.
-회오리33님의 답변
4차 전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집트군대의 선공격으로 벌어져 시나이 반도를 공격햇던 그때 북한군 군사고문단이 현장에서 전투지휘를 했었다고 북한군에 있을때 확실히 강연. 자료 등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군이 수에즈운하 에 쌓아놓은 모래벽을 고압물 펌프로 허무는 작전도 북한군사고문단에서 했었다는 설~ 전후 이집트 측에서 전쟁기념관 건립과 내부전시를 북한군에 맡겼었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조만간 중동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재개하도록 하고 오늘은 남아공의 32대대에 대해 짬을 좀 내보는 걸로 글쓰기 욕구에대한 만족을 시켜야 할 것같다.
오늘날 아프리카 내전에는 몇가지 요소가 있는데 그중하나가 군사기술의 급속한 발전, 그리고 다이아몬드와 물을 비롯한 자원 쟁탈, 인종갈등(흑과 백, 흑과 흑간의 문제) 마지막으로 보병무기의 급속한 확산이다.
이를 토대로한 영화들이 몇가지 있는데 니콜라스 케이지가 주연하고 죽음의 무기상인역을 한 영화 "Lord of War"나 디카프리오의 "블러드 다이아몬드"가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 되겠다.
물론 흥행은 글쎄? 지만 사실에 대한 지적은 나름 날카로웠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케이지 아저씨는 병역 면제라서 그런지 도시출신으로 나오지만 디카프리오는 동안인데 비해 32대대 출인이라고 한다. 바로 그 32대대가 오늘 이야기하고자하는 주제이다.
1970년대 아프리카 각국. 특히 로디지아에서는 인종문제로 앙골라는 이념문제로 장기적인 내전이 일어나는 혼돈의 시대였으며 또한 보병전투기술의 급속한 발전을 가져온 시기였다. 특히 대표적인 부대가 로디지아 SAS였고 그 뒤를 잊는 부대가 남아공의 32대대이다.
1975년 앙골라 공산반군 FNLA가 앙골라 정부를 상대로 내전상황에 들어가고 남아공(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아프리카 남부의 지배권 약화를 우려 앙골라 정부군을 지원하였다.
특이한점이 바로 앙골라에서 동쪽으로 잠비아가 있고 그 바로밑이 짐바브웨 되겠다. 이곳이 바로 과거 로디지아로 불리우던 또하나의 백인국가로써 1970년대 앙골라와 로디지아로 이어지는 아프리카 남부 축선이 장기 혼란상태였음을 지도가 역사를 비춘다고나 할까?
아무튼 감상은 여기서 접고 1975년 앙골라를 지원하기위해 남아공에서는 SADF(남아프리카방어군)을 파견하였고 같은해 Jan Breytenbach대령에 의해 32대대가 창설된다.
이부대의 임무는 비정규전 수행으로 주로 매복과 기습, 적 지휘부에 대한 테러 및 사보타지를 담당하는 특수부대로 현대 보병전술을 새로 만들었다 할 만큼 새로운 전술과 전략으로 적을 유린한다.

1993년 해체때까지 남아공의 국경분쟁에 동원된 이부대는 단순히 싸움잘하는 부대로만 유명하지 않다. 사실 새로운 전술을 시험하고 만들었지만 이들이 훈련받은 곳이 바로 영국 SAS인것은 변함없는지라 영국의 충실하고 능력있는 전투원 만들기를 당한(?) 부대일뿐 그리 크게 평가된적은 없었던 부대였다.
1993년 부대가 해체되자 이 전문 싸움꾼들은 할일이 없어 졌고 이븐블로우라는 장교를 중심으로 용병회사를 만들었는데 바로 이 회사가 E.O.(Executive Outcomes)이다.
1990년대초 시에라리온의 반군 RUF (지도자:포데이상코)는 중소 반군을 다 통합한뒤 자신의 반군병사들을 어린이로 채워나가며 그들에게 마약을 투여하였다.

이렇게 마약을 투여당한 병사에게 남는것은 살육의 본능 밖에 남지 않게되고 이들의 엄청난 전투력으로 시에라리온의 수도 프리타운 20km까지 밀어붙인다.
그러자 서방국가들로 부터 도와주겠다는 청을 듣게되나 이미 1961년 서방국가로 부터 독립한 이력이 있던 시에라리온은 도움의 요청을 거부하고 EO 300명의 병사와 월 100만달러의 급여와 최대 다이아몬드 광산인 코이듀지역의 채광권을 허용하는 조건으로 전쟁계약을 맺기에 이른다.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반군(좀비같았을까?)에게 이들이 제일먼저 행동한것은 불의 벼락과 함께 기존에 아프리카 반군들은 듣도 보도 못한 기동으로 단 9일만에 120km가량 밀어낸다.
또한 한달만에 그들이 약속받은 코이듀 지역을 탈환하고 반군 잔적소탕전에 돌입한다.
이후 반군은 RUF의 사면과 사회통합을 약속받으며 EO의 전면철수를 내세워 평화협정을 채결하였고 EO에서는 자신들이 철수하면 100일이내에 군사 쿠테타가 일어날것을 예견하였다.
이후 95일만에 쿠테타가 발생하여 정권이 무너졌다. EO는 모기업인 브렌치 에너지社에 합병되었다가 후에 코이듀 홀딩스라는 회사명으로 개칭하여 아직 코이듀를 장악하고 다이아몬드 채굴로 막대한 돈을 벌어 들이고 있다.
이로써 한동안 국가가 독점하고 있던 군사분야에 민간 참여가 이루어 졌고 이로인하여 각국 특히 미국에서는 퇴역 군인을 중심으로 민간 군사 용역회사 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현재 2차 걸프전에서도 활약하고 있는 실정이다.
츠비카 그린골드라는 사나이로 현재는 군인생활을 접고 이스라엘 화학회사의 전무이사로 노년을 보내고 있다.

1973년 10월 6일 개전당시 젊은 중위로 아직 보직조차 받지 못하고 집에 있었다. 물론 욤키푸르(아랍에서는 라마단)이라고 하는 속죄일. 다시말해 휴일을 보내고 있던 그가 부대에 있었다면 당직근무였을것이다.
암튼 그날 오후 2시에 머리위로 전투기가 지나갔고 무전을 통해 개전사실을 알았다. 급히 제복으로 갈아 입은후에 뛰어나가 자신의 부대 숙영지로 복귀한후 M3하프트럭의 무전기를 통해 발령 받기전의 부대를 호출해서 명령계통에 들어갈것을 승락받고 전투후 수리를 위해 숙영지로 돌아온 센츄리온 전차 4대를 발견인수했다. 그러나 가동이 되는전차는 1대뿐이었고 승무원중 2명은 부상을 입은 상태이며 나머지는 쇼크에 빠져있는 상태였다. 다른 부대에서 1대를 받아 총 2대로 전장으로 달려 간다.



수리가 끝나자 이 겁없는 전차장은 2대를 가지고 자신의 이름을 붙여 "Zvika's Force"(츠비카 부대)라고 이름 붙여버린후에 연대 무선망에다가 "즈비카 부대가 구원을 가겠다"고 통보해버린다.
(무슨배짱인지 2대의 전차에다가 멋대로 "부대"라는 이름 붙여버린... 황당한 배짱이다.)
더 황당한것은 고전하고 있던 기갑 부대 전체가 이 달랑 2대 전차를 구원군으로 착각해버리고 희망이 없던 기갑부대에 힘을 불어넣어 버린것이다.
"이제곧 지원군이 온다! 조금만 더 버텨라!"
그렇게 전선에 도착했을때는 이미 수백대의 시리아군 기갑사단 T-62전차가 전진해 오고 있었고 첫교전에서 자신이 타고온 전차에 이상이 생겨 다른전차로 갈아타고 타고있던 전차는 수리를 위해 기지로 돌려보낸다.
이 황당하고 배짱좋은 중위는 2가지를 느꼈다고 술회하는데 첫째, 생존확률 0%와 고독감에 대한 공포, 그리고 책임감이었다고 하며 책임감을 더 많이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결과는 어이없게도 단 1대의 전차로 수백대의 전차를 농락하고 있었다. 쏘고 뒤로 퇴각해서 은폐하고 다시 쏘고 이렇게 반복함으로써 시리아군은 대규모의 이스라엘 기갑부대에 반격당한줄 알고 진영을 재정비하기위해 멈추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였다.
이때 본인은 한 10대정도 명중시킨것으로 기억하고 있고 최초 탑재한 72발의 전차탄을 다 소모하자 파괴된 다른 아군 전차에서 포탄을 옮겨와서 보급을 마치고 또 이동과 사격을 계속 하였다고 한다.
그날밤 우지중령이 지휘하는 8~9대의 지원군이 합류했고 시리아군 T-55 수십대와 조우. 수식간에 3~4대의 이스라엘 전차가 피격되었지만 2~3대씩 짝을 지어 전진하자고 건의하였고 순간 패닉에 빠진 아군전차에 뒷통수를 맞고 운전병은 전사. 다른 승무원은 탈출. 본인은 양손과 얼굴에 화상을 입고 다른 전차로 옮겨탄다.
나머지 2~3대는 부상자를 싣고 후퇴해버려 결국 츠비카 중위 혼자 남게 되었다.
그렇게 밤을 보낸후 2일째 나바크 기지를 공략하기위해 시리아 T-62 수십대가 몰려 들어왔고 부여단장이 끌고온 6대의 전차와 13대의 동원기갑중대를 증원받아 20대로 전투에 임하게 된다.
야시장비가 없어 힘겨웠던 야간에 비해 수킬로 밖에서 명중탄을 날리는 이스라엘군이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게 되었지만 정작 나바크 기지는 북쪽으로부터의 보병, 전차 합동공격에 의해 이곳으로 이동하던 바라크 기갑여단은 여단장, 부여단장, 작전참모등의 지휘부가 전사하게 되어 지휘망이 붕괴되었다.
츠비카 중위는 방어를 위해 나바크 기지로 복귀해 단 2대의 전차로 언덕에서 나바크 기지를 공격하던 시리아군 전차를 제압하여 퇴각할 시간을 번다.
나바크 기지에서는 츠비카중위가 유일한 장교였고 츠비카 중위 차량 운전병은 전투스트레스로 철수하는 장갑차에 몸을 싣고 도망가버렸다. 후에 인사장교에게 연락해서 인사장교가 조종수를 지프에 태워 직접 나바크 기지로 왔으며 최후방어전을 치르기위해 회의하던도중 정보장교 품에 쓰러져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7일후 전장으로 복귀하였다.
30시간의 혈투끝에 그는 살아 남았고 기억나는 격파만 20여대의 적전차를 잡았다고 했지만 전투후 각종보고를 통해 60여대 이상을 격파한것으로 공식 기록되었다.
2년뒤인 1975년 이 전쟁을 통해 단 8명만이 받은 최고 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 2차 세계대전의 독일전차 에이스 미하일 비트만보다 더 격렬했고 우수했다. 왜? 혼자서 그 많은 적을 상대한것도 한것이러니와 그것보다 적보다 대등하거나 야간에는 오히려 열세의 장비를 가지고 싸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인생을 보면 그리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던듯 하다.
그의 평전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18년생으로 왕립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2차대전때는 알랙산드리아에서 근무하였다.지도자의 무능력하기보다는 어찌보면 이집트라는 나라의 한계에 부딪힌 인물이자 클레오파트라 이후 최초의 이집트인 지도자이자 영국에서 완전한 독립을 이루어냈고 수에즈운하를 국유화 하는등 사회주의자이면서도 이집트의 영웅이었다.
1948년 1차중동전쟁때는 소령으로 대대를 이끌고 전쟁에 참가 팔루자에서 몇주동안이나 이스라엘군에 포위당해 교전중 부상을 당하고도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전투를 수행하여 이집트군중 유일하게 제대로 싸운 부대의 부대장이었다.
1차 중동전쟁후 부상치료를 위해 병원에서 지내며 왜? 전쟁에 졌는가를 고민한 끝에 정부의 부패와 무능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자유장교단"을 결성. 이집트의 완전한 독립과 개혁을 위해 쿠데타를 준비한다.
1952년 6월 23일에는 무혈쿠데타에 성공 이집트왕조를 망명시키고 토지개혁을 단행. 1956년 6월에 영국군 마저 철수시키고 대통령이 된후 2차, 3차 중동전에서 이스라엘과 싸웠다. 그러나 3차 중동전에서의 패배. 다시말해 이집트의 군사력이 회복불가능할 정도로 거덜나자 사의를 표명. 그러나 국민들의 시위로 투표후 연임하였다. 1970년 미국이 제안한 이스라엘 평화로드맵에 동의하였고 요르단에서 일어난 팔레스타인 게릴라와 요르단군의 전투를 중재하는 활동을 하는 중 아쉽게도 그해 9월 28일 심장마비로 서거하였다

나세르가 죽자 그의 부대통령이자 전 "자유장교단"을 창설맴버였던 사다트가 집권한다.

사다트가 집권하자 모든것을 바뀌었다. 훈장만 주렁주렁 매달고 화려한 군복입고 뒤에서 뒷짐지며 지휘하던 장교들부터 군에서 숙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부하들과 같이 뛰고 구르며 땀흘리는 젊은 장교들로 채워나갔다.
그리고 외부환경도 변했다. 소련뿐만 아니라 시리아를 지원하던 북한도 이집트를 지원했다.
비행중대1개 중대와 방공망 등으로 지원하였고 군사고문과 훈련을 담당했으며 초전 기습은 그야말로 북한의 작전대로 진행되었다. 물론 그 뒤의 기만작전 도 북한 군사고문단의 작품이다.
물론 북한이 3차 중동전쟁에서도 조종사를 포함해 1500명가량 시리아에 지원한 적이 있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그 전쟁은 이스라엘이 주도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4차 중동전쟁은 이집트에 의한 다시말해 북한에 의한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성격자체가 다르다고 할 수 있을것이다.
아무튼 이집트는 빠르게 재건되어나갔고 이집트군 코만도들은 이스라엘 방어진지를 상대로 실전 훈련하는 정도였고 이스라엘군은 중화기로 보복하는 등 휴전기간내내 서로 평화하고는 거리가 먼 싸움만 계속 하였다.
그시기 이스라엘은 3차 중동전쟁을 통해 얻은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다.
다시말해 동쪽으로 요르단과 시리아를 두들겨 패서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한데다가 서로는 수에즈 운하를 사이에 두고 운하에 계속 무너지는 모래의 특성을 이용한 높디 높은 모래요새를 만들어 기갑부대의 진입을 완전 차단한데다가 강력한 방어막마저 갖추었고 걱정되는 이집트의 공중세력과 지상세력은 완전히 소멸된 상태였으니 발뻗고 자도되는 시절이 온것이다.
요르단은 팔레스타인 게릴라들과 전투중으로 거의 실신지경이 되었다.
시리아는 뺐긴 골란고원을 어떻게든 찾아보려고 시도함과 동시에 소극적인 전쟁준비를 할뿐이었다.
이렇게 이집트의 시나이 회복작전은 준비되고 있었다.
이제껏 이집트와 요르단을 열심히 두들겨팬 이스라엘 이야기만 했지만 개전시점인 1967년 6월 5일 시리아군역시 공습을 두들겨 맞고 있었다. 그덕에 시리아공군은 개전날 앉아서 2/3가 날아가버렸고 도저히 강력한 이스라엘군을 상대로 작전을 펼칠 수 도 없었다.
그덕인지 시리아군은 해발 1000m의 깍아지른 골란고원의 요새에 쳐박혀 비교적 조용히 짱박혀 있었으며 이집트와 요르단 전선이 한바탕 난리 칠때도 6월 6일 이집트 방송에 속아 넘어간 시리아군 2개 대대가 T-55전차 20대를 앞세우고 공격하였다가 200여명의 손실을 낸채 후퇴한것이 공격의 전부였다.
그렇다고 이스라엘군도 무작정 요새로 뛰어들수도 없어 초초하게 증원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이렇게 개전전의 골란고원에서 정착촌으로 쏴대던 포격도 없이 개전 5일째인 6월 9일을 맞이한다.
6월 9일 아침 북부군 사령관에게 한장의 명령서가 전달된다. 요지는 최대한 빠른시간내에 골란고원을 장악하고 시리아 본토로의 진격은 금지한다라는 명령서다.
그와 동시에 시나이반도와 Westbank 전선의 병력들이 증원된다.
6월9일 아침 9시 공수부대도 우습게아는 오랜전통의 정규보병부대인 골라니여단과 이를 지원하는 알버트기갑여단의 죽음의 등반이 시작되었다.
연약한 지반탓에 무거운 전차의 기동이 제한되었는데 공군이 요새를 폭격하는동안 보병이 네발로 기어오르고 곡갱이질 삽질을 해서 진격로를 만들면 그곳을 따라 기갑차량이 기어오르고 보병은 다시 기갑차량뒤로 잠깐 몸을 숨긴뒤에 공군의 폭격을 기다리는 식으로 그야말로 한발 한발 기어올라 갔다.
그렇게 한발 한발 죽음의 등반을 한끝에 기갑부대를 요새입구에 가져다 놓은후 전차포의 지원을 받은 골라니여단의 돌격이 시작되었다. 총 13개의 목표를 점령하는 것이었는데 돌격초기 선두에서 지휘하던 장교들이 다 죽어버렸고 어느 중대는 중사가 중대장이 되었고 어느중대는 목표참호에 도착했을때 3명만 생존하기도 했으며 단 8명만이 살아남은 중대도 있었다.
6월9일 저녁무렵 승리한 쪽은 이스라엘이었다.
그러나 이제 골란고원에 발을 디딘 이스라엘군이 모든 목표를 달성했다고 말할 수 없다. 시리아는 당황했고 6월 9일 밤 헬기를 동원한 이스라엘은 각종 물자를 실어날랐고 돌아갈때는 부상자들을 수송했으며 속속 달려온 증원부대는 다음날부터 시작될 골란고원에서의 레이스를 기대하며 재편하고 있었다.
날이 밝자 대편대의 공군 공습이 시작되었고 기갑부대를 중심으로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전일 당한 복수를 하자며 이를갈고 달렸지만 어디에도 적은 없었다.
발견한 것이라곤 텅텅빈 벙커에 문서들을 소각한 흔적, 엔진열기가 남아있는 빈 전차 들뿐이었다.
이런 황당한 사건은 당일날 아침 8시 국영방송의 "골란고원이 점령당했고 다마스커스로 이스라엘군이 진격중"이라는 속보때문이었다. 그덕에 골란고원을 지키고 있던 시리아군은 짐싸서 수도 다마스커스로 철수해버린 것이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주인이 나간 땅을 그렇다고 버려둘 이유는 없지 않는가?
아무튼 그들은 하루종일 달렸고 오후6시 UN의 정전 협정을 마무리했을때 저만치 다마스커스의 사원첨탑이 보일때쯤 진격을 멈췄다.


이로써 단 6일만에 이스라엘은 본토의 6배나 되는 땅을 점령하였다.
개전초 언제 공격당할지 그리고 공격당했던 지역을 자신들의 소유로 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위협을 제거한다.
가령 이집트는 이제 이스라엘을 공격하려면 수에즈를 건너야 하며 시리아는 골란고원의 경사를 따라 이스라엘 기갑부대가 브레이크를 풀고 기어내려오기만해도 시껍해야 할 판이다. 더군다나 요르단은 형님 나라들에 등떠밀린 덕에 GDP의 절반을 생산하던 경제요충지를 뺐겨버렸다.


휴~ 길고 어려웠던 3차 중동전 6일전쟁을 마친다.
몇명 죽고 몇명 죽였다식의 숫자는 될 수 있으면 배제하려 하였다. 그런 숫자는 치열했던 전투를 증명하는 정도로만 사용했다. 몇명 죽고 죽였다가 중요한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기고 어떻게 졌으며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앞으로도 이런 취지로 글을 쓰겠다고 다짐한다.
시계를 돌려서 개전시점인 1967년 6월 5일로 가보자.
요르단이라는 나라의 배경을 쬐금 알필요가 있는데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은 머어어어언 친척인 팔레스타인
들을 도와줄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그러나, 요르단이라는 나라 자체가 북으로는 시리아 동으로는 이라크 남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걸프만을 건너 이집트라는 아랍강국으로 둘러싸인 아랍소국이다.
따라서, 요르단은 이스라엘이라는 아랍의 적과 싸움 뿐 아니라 형제국들 틈바구니속에서도 살아남아야 했다.
처음에 언듯보기에는 화끈한 돌격의 사전 공격으로 인식될 수 도 있겠지만 이스라엘의 주력이 시나이 반도를 관통해 갈때 주력이 빠진 적에 화력만 퍼붓는 실수를 범한다. 물론 요르단은 아직 준비가 안되어 있었다는게 내 생각이다. 왜? 당시 요르단의 주력전차부대는 이스라엘을 횡단하여 서해로 나가기위해 요르단 Westbank에 집결중이었다.이렇게 꾸물거리는 사이 시나이 전투는 고비를 넘어 승리의 여신이 이스라엘에게 미소를 보낼때쯤 급히 시나이 전선에서 빼낸 병력으로 6월 6일부터 이스라엘의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되었다.
제 55공수여단은 시나이에 투입될 예정으로 장비가 시나이 전선에 가 있는 바람에 비무장인채로 민간버스에 몸을 싣고 예루살렙으로 달려왔다. 예루살렘을 지키고 있던 에루살렘여단으로 부터 급히 실탄과 화기를 얻어고 공격 준비가 끝난시점인 6월 6일 새벽 2시에 겨우 공격을 시작할 수 있었다. 구시가지는 기원전부터 세워진 방벽과 미로와 같은 시가지, 거기다가 언덕으로 경사진 덕에 방어측이 유리한 전투였다.

작전 개시 2시간이 지난 시점에 1단계인 철조망과 지뢰를 돌파하는데만 여단병력의 반이 손실된다.
요르단군의 참호에 돌입하자 이제 반대의 입장이 되버렸다. 짧은 우지기관총을 소지한 이스라엘군이 길고 화력은 쎄지만 연사능력이 떨어지는 M1을 소지한 요르단군을 압도한 것이다.
요르단군은 제1왕실근위사단으로 나름 최정예였으니 그야말로 정예끼리의 전투에서 단발의 차이로 이스라엘이 승기를 꽂는다.
그시각 예루샬렘 주변 언덕을 차지하기 위해 양군의 군마인 기갑부대가 혼전을 벌였고 슈퍼셔먼을 주력으로 하고 있던 이스라엘기갑부대는 M-48 패튼으로 무장하고 있던 요르단군 기갑부대와의 전투에서 20대중 12대를 격파함으로써 또한번 승리로 만들었다.
오후6시경 예루샬렘은 이스라엘 수중에 떨어졌고 전투후 예루살렘 구시가지는 피가 흐르지 않은 골목이 없었고 탄흔이 박히지 않은 벽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55공수여단을 지원하던 기갑부대는 대부분의 전차장이 저격으로 전사한 뒤였을 정도로 치열했다고 한다.
요르단은 Eastbank까지 위협당하자 M-48 40대를 주력으로 반격을 시도한다.
이에 이스라엘의 자랑인 공군력으로 집결중인 요르단의 수송부대와 기갑부대에 대해 공습으로 대응한다.
마지막 피날레는 기갑여단이 맡았다. 제리코 도심에 진입하기위해 이동중 포도밭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던 요르단군의 M47/48전차 16대를 발견하고 이들과 다시 전투를 하였고 이들을 제압한다.(도망치기 장기인 이집트와는 또다른 면이다. 이렇기에 이스라엘은 요르단을 그나마 껄끄러워한다.)
제리코시에 진입한 이스라엘군은 요르단 수도 암만으로 부터 40km까지 밀어붙임에 따라 요르단은 UN에서 중재하는 휴전에 합의하여 전투를 종료한다.
전후 녹아없어진 이집트에 비해 손실이 그리 크지 않았다. 일례로 요르단에서는 15,000명 손실이라고 하지만 이스라엘의 전과확인은 최대 1,500에 불과하다는 발표다. 그에 비해 이스라엘은 전사 299명, 부상 1,457명의 전쟁최고의 피해를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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