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9월 이집트의 허풍쟁이 나세르 대통령이 갑자기 서거한다.
하지만 그의 인생을 보면 그리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던듯 하다.
그의 평전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18년생으로 왕립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2차대전때는 알랙산드리아에서 근무하였다.
1948년 1차중동전쟁때는 소령으로 대대를 이끌고 전쟁에 참가 팔루자에서 몇주동안이나 이스라엘군에 포위당해 교전중 부상을 당하고도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전투를 수행하여 이집트군중 유일하게 제대로 싸운 부대의 부대장이었다.
1차 중동전쟁후 부상치료를 위해 병원에서 지내며 왜? 전쟁에 졌는가를 고민한 끝에 정부의 부패와 무능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자유장교단"을 결성. 이집트의 완전한 독립과 개혁을 위해 쿠데타를 준비한다.
1952년 6월 23일에는 무혈쿠데타에 성공 이집트왕조를 망명시키고 토지개혁을 단행. 1956년 6월에 영국군 마저 철수시키고 대통령이 된후 2차, 3차 중동전에서 이스라엘과 싸웠다. 그러나 3차 중동전에서의 패배. 다시말해 이집트의 군사력이 회복불가능할 정도로 거덜나자 사의를 표명. 그러나 국민들의 시위로 투표후 연임하였다. 1970년 미국이 제안한 이스라엘 평화로드맵에 동의하였고 요르단에서 일어난 팔레스타인 게릴라와 요르단군의 전투를 중재하는 활동을 하는 중 아쉽게도 그해 9월 28일 심장마비로 서거하였다
지도자의 무능력하기보다는 어찌보면 이집트라는 나라의 한계에 부딪힌 인물이자 클레오파트라 이후 최초의 이집트인 지도자이자 영국에서 완전한 독립을 이루어냈고 수에즈운하를 국유화 하는등 사회주의자이면서도 이집트의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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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전대통령 나세르]

나세르가 죽자 그의 부대통령이자 전 "자유장교단"을 창설맴버였던 사다트가 집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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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군을 부활시킨 사다트 이집트 전대통령]

사다트가 집권하자 모든것을 바뀌었다. 훈장만 주렁주렁 매달고 화려한 군복입고 뒤에서 뒷짐지며 지휘하던 장교들부터 군에서 숙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부하들과 같이 뛰고 구르며 땀흘리는 젊은 장교들로 채워나갔다.
그리고 외부환경도 변했다. 소련뿐만 아니라 시리아를 지원하던 북한도 이집트를 지원했다.
비행중대1개 중대와 방공망 등으로 지원하였고 군사고문과 훈련을 담당했으며 초전 기습은 그야말로 북한의 작전대로 진행되었다. 물론 그 뒤의 기만작전 도 북한 군사고문단의 작품이다.
물론 북한이 3차 중동전쟁에서도 조종사를 포함해 1500명가량 시리아에 지원한 적이 있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그 전쟁은 이스라엘이 주도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4차 중동전쟁은 이집트에 의한 다시말해 북한에 의한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성격자체가 다르다고 할 수 있을것이다.
아무튼 이집트는 빠르게 재건되어나갔고 이집트군 코만도들은 이스라엘 방어진지를 상대로 실전 훈련하는 정도였고 이스라엘군은 중화기로 보복하는 등 휴전기간내내 서로 평화하고는 거리가 먼 싸움만 계속 하였다.

그시기 이스라엘은 3차 중동전쟁을 통해 얻은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다.
다시말해 동쪽으로 요르단과 시리아를 두들겨 패서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한데다가 서로는 수에즈 운하를 사이에 두고 운하에 계속 무너지는 모래의 특성을 이용한 높디 높은 모래요새를 만들어 기갑부대의 진입을 완전 차단한데다가 강력한 방어막마저 갖추었고 걱정되는 이집트의 공중세력과 지상세력은 완전히 소멸된 상태였으니 발뻗고 자도되는 시절이 온것이다.

요르단은 팔레스타인 게릴라들과 전투중으로 거의 실신지경이 되었다.

시리아는 뺐긴 골란고원을 어떻게든 찾아보려고 시도함과 동시에 소극적인 전쟁준비를 할뿐이었다.

이렇게 이집트의 시나이 회복작전은 준비되고 있었다.
2007/03/09 16:20 2007/03/09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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